아침 일찍 스마트폰에서 띵동하고 소리가 났다. 무슨 바쁜 일이기에 이렇게 일찍 메시지를 보낼까하며 스마트 폰을 열어보니 중.고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새벽에 운명을 하였다고 동기모임인 상조회 총무가 보내온 부고였다.

이를 보자 지난날 60, 70년대에 함께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모습이 파노라마 처럼 눈앞을 스쳤다. 검정색 교복에 검정색모자, 까까머리에 책가방을 들고 함께 6년간 교문을 드나들던 그 친구, 고향을 떠나 사업차 인근에서 사무실을 내고 열심히 살아온 그였다.

바쁜 가운데서도 친구들이 보고싶다며 두달에 한번 씩 모이는 상조회 날이면 자주 찾아와 서로 안부를 물으며 지난 삶의 여정속에서 나름대로 힘들고 어려웠던 일, 그런가하면 간간히 좋은 일이 있어 자신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했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삼겹살에 소주한잔을 기울이며 삶의 애환을 노래했던 그 친구가 아니였는가 말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타가 인정해주는 성실한 그였다. 소박하면서도 친구들의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왔던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야속했다. 창조주가 부르면 누구나 그 길을 가야되지만 왜 이처럼 빨리 데려가신단 말인가. 60대 중반이다. 옛날같으면 그리 빠른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현대의학이 발전한 오늘날로서는 조금 이른 것 같아 더욱 아쉽기 그지없다.

지금까지 가장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하루도 어깨가 가벼울 날이 없었던 지난날의 삶이었다면 오늘의 삶은 아름다운 황혼기를 하루하루 아름답게 갈무리해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만한 여유도 창조주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너무 짧게만 주셨다. 지나가는 과정처럼 말이다.

하기야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쉬움은 가슴에 묻어두자. 언젠가는 같이 만날 것이 아닌가. 
돌이켜 보면 그 친구 뿐만 아니라 우리네 삶은 올곧게 앞만 보고 달려왔다. 옆길을 바라볼수 있는 여유도 없었다. 숨가쁘게 달려왔던 그 친구를 비롯한 우리네들의 삶,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때로는 허전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여 누구와도 말하기도 싫고 자신의 설 자리가 변변치 못해 좌불안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욕심이라는 작은 보따리를 미련없이 내려놓으니 마음은 한결 가볍다. 그런데 그 보따리가 왜 이리 무거웠는지 말이다.

불현듯 좋은 글이 있어 조용히 음미해본다.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설수 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 (중략)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부자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해도 내 삶에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를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내 삶, 내 인생 나.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참으로 이 글을 다시 읽어볼 때마다 가슴이 저미어 온다. 그리고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 현재 하나님의 자녀로 건강하게 살아있고 더구나 사랑하는 가족이 옆에 있는데 뭐 그리 불평을 달고 살아왔는지 생각해보면 어리석기 그지없다.

불현듯 <평생감사>의 저자인 전광목사님의 “가장 평범한 하루가 가장 행복한 하루입니다. 당연한 것을 감사하기 시작하면 또 하나의 열매가 만들어 집니다. 많이 가졌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감사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라고 한 그 말씀이 뇌리를 스친다.

그렇다. 이제부터라도 남은 인생을 감사로 물들이자라고 속으로 다짐해본다. 조금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의 명복도 두손모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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