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병원 설립, 구호물자 받아 복지에 앞장
성결인 김창근 목사, 우파 집결·반탁운동 기여

▲ 우리교단은 해방 후 교회재건 등 재흥을 위해 노력했다. 사진은 해방 후 열린 첫 경성신학교 졸업식.
광복 73주년을 맞은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발전하고 안정적인 기틀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해방 후 한국교회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해방 후 한국교회는 무너진 나라를 재건하는데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국가를 대신해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설립하고, 미국에서 구호물자를 받아 국민들의 복지를 담당했다. 해방 이후 기독교는 단지 종교단체가 아니라 정부가 해야할 일을 대신하며 유사 정부의 기능을 담당한 것이다.

허명섭 목사(시흥제일교회)는 “미군정 행정고문 11명 중 6명, 군정 초대 한국인 국장 13명 중 7명, 입법의원 90명 중 21명과 초대 제헌의원 190명 중 38명이 기독교 신자였다”며 “당시 남한 기독교인의 숫자는 전 국민의 0.52%로 약 10만여 명에 불과했음을 감안하면 새로운 시대와 더불어 호흡할 수 있는 적응력과 준비된 인적 자원이 그만큼 풍부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당시 우리교단은 이런 활동과 함께 일제시대 때 폐쇄된 교회 재건과 교계 연합사업에 힘썼다. 박명수 교수에 따르면 해방이 되자 성결교회는 곧바로 재흥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교단의 재건에 나섰다. 또한 박현명 목사가 한국기독교협의회 제3대 회장에 피선되는 등 찬송가합동위원회, 주일학교연합회 등 한국교회의 연합사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성결교회가 해방 후 한국교회의 연합과 재건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 김창근 목사
정치사회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성결인도 있다. 바로 김창근 목사다. 김창근 목사의 행적은 1941년 12월 일제가 태평양전쟁 지지연설을 요구하자 거절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 일로 김창근 목사는 투옥되어 일주일간 고문 받고 고문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또한 1943년 5월 24일에는 예수 재림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전국의 성결교회 교역자, 장로, 집사 300여 명이 구속됐는데 이 때 김창근 목사도 구속되었다. 김 목사는 이렇게 두 차례에 걸쳐 구속되고, 참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일제의 불의에 항거했다.

김창근 목사는 해방이 되자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 출범에 동참하며 본격적으로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성결교회 총회 서기였던 김 목사는 38세로 성결교회를 대표해서 비상국민회의와 독촉국민회에 참여했다.

김창근 목사의 가장 큰 업적은 우파를 결집하고 반탁운동에 참여한 일이다. 그는 독촉국민회 의장 이승만을 만나 지방조직을 점검, 확산했으며 학생 단체인 반탁전국학생총연맹(반탁학련)과도 관계를 맺고 반탁운동을 이끌었다. 특히 자주독립과 새로운 국가건설을 간절히 소망하는 반탁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대한민국의 건립을 위한 국민들의 간절한 소망을 대변하기도 했다. 당시 미군정하에서 입법의원의 역할은 한계가 있었고 실제로 통과시킨 법안이 매우 적었다는 점에서 김창근 목사의 역할은 두드러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독촉국민회를 핵심적으로 이끌었던 김 목사는 1947년 3월 21일 열린 제35차 본회의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사임 이유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총회 차원에서 진행시켜야 하는 재건사업을 뒤로 하고 그가 정치에 전념하기에는 어려웠다는 분석이다.

짧지만 굵은 발자취를 남기며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김창근 목사는 이후 성결교회 재건사업과 기독교 연합활동에 전념했다. 1945년부터 교단 서기 2회, 1947년부터 교단 부총회장 5회, 1953년부터 총회장을 2회 연임하는 등 교단의 발전에 헌신적이었다.

이후 1951년 대한성서공회 회장으로 피선된 후 두 차례 역임하고 1953년에는 기독교연합회(KNCC) 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하는 등 연합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김창근 목사가 이런 활동을  한 것은 “정치는 국가와 민족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보호막이다”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목사였지만 신념에 따라 일제에 항거하고 해방정국에서는 정치에 참여했으며 성결교단의 재건에도 앞장선 것이다.

그의 신념은 활천 제255호에 투고한 글에도 잘 나와 있다. 당시 그는 “주님을 위하여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양과 같이 희생의 제물이 되기를 엄숙히 서약하자”는 심정을 고백했다. 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대상자가 민족이었고, 정치 대상자들도 민족이었으며 그의 가슴으로 품은 소외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도 민족이었던 것이다.

장금현 박사(서울신대)는 “김창근 목사의 정치활동 중심에는 민족에 대한 애정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바른 정치만이 해방정국에서 국가의 정체성을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라고 설명했다. 국가의 바른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정치를 선택했고 헌신한 것이다.

일제에 항거하고 해방 후에는 교단재건과 국가 건립, 교계의 연합을 위해 헌신했던 김창근 목사의 신념을 기억하고 계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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