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 교수
최근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여러 모양의 혐오 현상이 넘실거린다. 무슬림 난민이 제주에 들어와 난민신청을 하면서 불거진 이슬람 포비아 현상과 혜화역을 중심으로 열리고 있는 여성단체들의 시위, 그와 관련된 몇몇 회원의 일탈적 남성 혐오 현상까지.

심지어 이들 중 몇몇은 가톨릭의 성체를 훼손하거나 더 심한 경우 특정 성당을 방화하겠다는 협박성 발언까지 마다치 않아 적잖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 사회의 이러한 혐오 현상 혹은 문화는 어떤 배경 아래에 생겨난 것일까?

일차적으로 다양성을 수용하는 우리의 문화적 환경이 미숙한 탓이라 할 수 있겠고, 이는 우리 사회가 오래도록 단일성 철학이 지배하는 사회였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조선이라는 종교 국가에 주자학이라는 단일한 이념으로 오래도록 지낸 탓인지 우리는 낯설고 다른 것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다른 문화권보다 크게 갖는 편이다.

사실 동일성의 철학, 즉 자신과 유사하거나 같은 것에 의존하거나 종속하려는 인간의 지향성은 어느 사회에나 있긴 하지만, 서구의 경우 18~19세기 개인주의적 인권을 강조하는 민주화 과정을 지나며 이성적으로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

반면 우리 사회는 서구의 민주제를 압축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타문화에 대한 이해나 그것에 대한 정보 축적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고, 그러다 보니 다양화된 현대 사회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에 대응하는 방식은 이전의 문화적 관성에 따르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질적인 문화에 대해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접근보다는 폭력적이고 혐오적 성격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은 편이라 하겠다.

요즘 남성 혐오 현상은 이와는 조금 결이 다르긴 하다. 한국의 여성들은 유독 한국 사회에서 자신들에 대한 제도적, 문화적, 실제적 배려가 적다고 느낀다. 이른바 한국식 ‘유리천장’에 대한 여성의 커다란 문화-정서적 불만이 현 한국 남성 혐오 현상의 기초를 이룬다고 하겠다. 유리천장이란 말은 1979년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당시 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가로막는 다양한 사회적 장벽을 일컫는 은유로 이 단어가 선택되었다.

우리 사회 역시 1970년대 미국 못지않게 실제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장애로 가득한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몇 년 전부터 반복되는 지하철 내 여성 성추행, 묻지마식 성폭행 살해, 조직 내 각종 성추행 등이 여성의 불만을 극대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종교에 대한 극단적 혐오까지 드러난 것은, 안타깝지만 한국 사회가 이미 극단적 세속화의 길에 들어섰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통계적으로 우리 사회는 무종교인의 수가 2015년 기준으로 56%를 넘어선 전형적인 세속화 사회이다.

2010년 기준 세계 종교인의 비율이 84% 이상인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세속화가 어느 정도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이런 비종교화 현상은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 심해진다. 20대 이하의 무종교인 비율은 64% 이상으로 젊은 층 절대다수가 종교가 없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종교 혐오 현상은 매우 무례하고, 반문화적 행위이긴 하지만, 종교 자체가 세속화되어 있는지라 이전만큼 종교에 대한 금기가 강하지 않아 이를 홍보의 도구로 사용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종교를 조직의 이념 확산을 위한 홍보 도구로 쓰는 것은 극단적 여성주의 운동에서는 서구에서도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에서 생겨난 여성주의 운동단체 페멘(FEMEN)의 경우 나무 예수상을 전기톱으로 자르고, 미사 직전의 성당 앞에서 토플리스 시위를 하는 등 과격하고 볼썽사나운 투쟁행위를 일삼은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워마드를 위시한 한국의 극단적 여성주의 단체들은 이러한 서구의 사례를 따르는 중이라 하겠다. 일베가 종교를 오락의 도구로 개인화했다면, 워마드를 위시한 여성주의 세력은 종교를 정치적 홍보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 모든 일이 신앙인의 관점에서 매우 불편하고 무례한 일이겠지만, 세속화 사회의 극단적 단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교회는 되레 이 현상에서 반면교사의 교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잊었기에 거센 세속화의 파고에 휩쓸리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어떤 아우라가 사라졌기에 우리의 금과옥조가 이념적 홍보를 위한 소용 거리와 도구로 전락해 버렸는지를. 잠시의 불편과 못마땅함에 매몰되기보다는 이를 전기 삼아 교회를 세속화의 흐름에서 제 모습을 지키게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배워야 할 제대로 된 타산지석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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