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17:1~7, 15~16)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는 언제 드러날까요?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향나무가 도끼에 찍히는 순간 나타납니다. 진짜 향나무는 도끼에 찍히면 찍힐수록 향기가 더욱 진동하는데, 가짜 향나무는 도끼에 찍히면 찍힐수록 도끼날만 상하게 할 뿐입니다. 

겉모습은 똑같이 보일 수 있지만, 도끼에 찍힘으로써 비로소 그 진위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아닌가는 평소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 건강과 재물, 생각과 뜻이 깨어지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찍혀 나가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인 때를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순간에 믿음이 가장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운 순간에 비 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그 사람은 참된 믿음의 사람일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가 낳은 수도사 샤롤르 드 푸코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결정적인 위기일 때 비 신앙적으로 처신하는 이유’로 첫 번째. 위기의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이고, 두 번째 하나님보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더 크게 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어려운 순간에 나를 바라본들 절망밖에 더 있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르비딤은 안식처 또는 원기회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이곳에 큰 기대를 하고 장막을 치고 마실 물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물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을 것입니다.

인생길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시련 없는 삶을 꿈꾸지만 그것은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삶의 여러 가지 문제의 핵심은 시련의 유무가 아닙니다. 진정한 문제는 그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문제 앞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시련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삶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좌절할 수 있습니다. 같은 시련이라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정반대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르비딤에서 물이 없는 시련을 당할 때 모세와 다투고 하나님을 시험했습니다. 저들은 역경과 시련이 훈련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8장 2~3절 말씀을 보면 광야생활 자체가 하나님의 시험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련의 의미를 깨닫고 시험을 이기고 승리해야 하나님의 축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서있는 그 자리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만일 내가 ‘맛사와 므리바’ 그 자리에 머물러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를 불평과 원망으로 누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요?

이 시간 우리가 서있는 자리의 이름이 바뀌길 원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기도로 ‘여호와 닛시’의 이름처럼 승리와 기적의 자리로 만들기로 결정하는 영적회복과 신앙의 결단이 있길 바랍니다.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