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함께 시작한 신앙생활과 사업의 번창

상준의 아버지 유진술 씨는 아들의 결혼을 생각했다. 마침 이웃에 살면서 허물이 없는 벗으로 가깝게 지내는 송도현 씨와 이야기 하던 중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는 며느리 감을 털어놓았다. 그 규수가 바로 송씨의 큰 딸인 재영 양이었다.

당시 일제는 동남아 일대에 진출하여 싸우고 있는 군인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조선의 소녀들을 꾀어 정신대로 차출해서 강제로 끌고 갔다. 딸을 가진 부모들은 결혼을 일찍 시켜야 정신대 차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런 사회적 악한 정책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재영 양의 아버지 송도현 씨는 혼사의 말이 나온 김에 유상준과의 혼인을 서둘렀다.

일제는 전쟁의 막바지까지 발악을 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연합군을 당할 수 없어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이 항복하므로 우리 민족은 해방되었다. 바로 그 해, 10월 24일 유상준과 송재영은 결혼식을 올리고 가정을 이루었다.

해방 된지 2달이 지난 뒤라, 두 사람의 결혼식은 규암면 나복리와 은산면 오번리, 두 마을의 축제가 되었다. 나이 17살에, 마음에 든 아내를 맞은 상준은 7살 때 처음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은산교회에 대한 좋은 감정이 어떤 그리움으로 되살아나자, 그는 가까운 규암교회에 가보았다. 

그는 은산교회보다 규모가 크고,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규암교회가 마음에 들어 새 아내를 설득하여 함께 규암교회에 출석하였다. 그의 부부는 규암교회에 출석한지 1년이 채 안된 1946년 7월 30일에 학습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 치리목사 김의용 목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아 곧 집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권면에 따라 양계업을 시작하면서 부지런히 일하고 또 열심히 기도했다. 그는 집 옆에 부화장을 포함한 양계장을 크게 지었는데, 양계업이 번창해서 상준은 농촌의 기수가 되어 모든 면에서 앞서가는 사람이 되었다.

그의 사업은 짧은 기간에 하나님이 도우셔서 확장되었다. 사업을 운영하는 스타일이 창의적이어서 상준의 사업은 부여군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그의 신분도 농촌의 지도자로 상승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신앙생활은 더욱더 독실해졌다.
1953년 가을에는 추수감사절 예물로 벼 20가마를 소달구지에 실어서 하나님께 봉헌하였다.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그 다음 주일날에, 규암교회 박종만 목사는 설교 중에 이를 밝혔다.

“우리 교회 유상준 집사가 벼 20가마를 추수감사의 헌물로 봉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말을 듣고, 예배가 끝난 후 찾아와 인사하는 성도들이 많아 고통스러웠다.

교회에서 일어난 이 사건이 교회 밖까지 소문이 나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다. 아직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가, 야단을 맞기도 했다. 유진술 씨는 아들이 자기 노력으로 수확한 벼지만, 아버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교회에 드린 것을 서운하고 또 못 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업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날로 번창해 갔다. 나무지게로 져 나르고, 소달구지로 실어 나르는 운반 수단이 트럭을 사용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규암면 일대가 유상준 집사의 사업 성공에 놀라며, 사람들마다 그의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예수를 잘 믿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으로 결론이 나서 전도의 효과가 매우 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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