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교회의 성장과 부흥

1929년에 창립된 김해읍성결교회의 1930년의 교세는 그 교회가 소속된 밀양지방의 10개 교회 가운데서 강세로 부흥하고 있었다. 김해읍성결교회의 초대교역자로 부임한 김광준 전도사는 김해성결교회가 창립되기 전에 김해에 주재하면서 봉림교회의 5대 담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1929년 3월에 파송되어 김해에 숙소를 정하고 시무하다가 김해제일교회의 창립멤버들과 접하게 되어 김해교회의 초대교역자가 되었던 것이다. 김 전도사는 창립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교회의 기초를 든든히 다져놓았다. 그는 1930년에 파송된 허순성 전도사와 봉림에서 김해로, 김해에서 봉림으로 분주히 왕래하며 열심히 전도하여 두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당시 김해교회가 창립 2년 만에 신도 103명, 주일학교 학생 75명 등 200여명의 신도로 부흥성장하고 있었으며 예배당건축기성회를 조직하고 활동하는 등 교회가 크게 발전하고 있었다.

1930년 가을에는 미국의 에즈배리대학 전도대를 초청하여 천막 전도로 많은 결신자를 얻었다. 결신자 중에는 그 지역에서 노래와 춤으로 유명했던 기생이 회개하고 돌아와 일반에게 복음진리의 빛이 크게 드러났고 교회는 매 집회마다 장년만도 100여 명씩 모여 예배당이 비좁아 교회증축을 위해 힘써 기도했다.

1931년 9월말에 부임한 제2대 교역자 유명정 전도사는 신유의 은사가 있었다. 그는 치유목회와 전도에 열심을 내어 교회를 부흥시켜나갔다. 황학석이라는 나병환자가 기도함으로 완치되고 황학석의 가족 7~8인을 구원시키고 그 이웃의 한 가정에게도 전도하여 주께 돌아오게 했다.

1931년 9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김규호 목사를 청하여 부흥회를 열었는데 매 집회마다 성신의 맹렬한 역사가 강림하여 성도들이 갖가지 죄악을 통회하고 자복할 뿐만 아니라, 회개의 열매를 맺어 완전히 중생한 이가 49인, 성결의 은혜체험자가 38인이나 되었고 10월 4일에는 권능의 역사로 말미암아 건축헌금이 445원에 달하였는데 어떤 이는 오막살이집을 팔아서 주께 바쳤친 자도 있었다.

1933년에 새로 부임한 천세봉(후에 천세광으로 개명) 목사는 부임하자 성도들의 메마른 심령을 소생시키기 위해 자신이 부흥강사가 되어 한 주간의 심령부흥회를 열었다. 청소년으로부터 신앙의 연조가 깊은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양의 죄악들을 통회자복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을 했다.

죄악을 회개하고 중생한 성도가 29명, 성결하게 된 성도가 21명, 신유의 은사로 치유된 성도가 7명이었는데 그 가운데는 7년간의 폐결핵 환자, 10여 년간의 정신병자, 3년간의 심장병으로 버림받은 시한부 인생이 치유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신하게 된 성도가 25명, 주께 헌신하기로 한 신자가 27명이고 십일조 헌금을 작정한 신자가 20명이고 금식기도를 한 성도가 10명이었다.

김해교회창립 멤버인 김병우 집사가 1932년 4월 19일부터 25일까지의 김해읍성결교회의 부흥회기를 활천 1932년 6월호에 올린 글을 요약해서 소개한다.

“본 교회가 이 땅에 탄생한 이래로 부흥을 위해 소리질러온 지 어느덧 만 3년이다. 그간 주님의 은혜가 임했으나 악마의 역사가 교회에 침입하여 받은 은혜를 파멸하고 여러 사람의 영혼과 육신을 흔들어 모진 동풍으로 당한 초목같이 죽은 상태에서 칠령팔락(七零八落)했다. 이 광경을 당한 교역자와 신자들이 눈물콧물을 흘리며 엎드려 울며 주님의 축복을 간구한 결과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김해교회에 임하여 주님의 종 천세봉(천세광) 선생을 본 교회에 특파하셨다. … 이팔소년으로부터 주를 믿은 지 40년 된 70노옹까지 전부가 흉악한 각양의 죄를 통회자복하고 생명강수에서 헤엄치며 해갈하여 이상과 기이한 꿈을 견득(見得)하고 환희용약(歡喜踊躍)하는 광경이야말로 오순절적 부흥이 아니고 무엇일까요? 맹렬한 성신의 불꽃이 뜻밖에 폭발하여 모든 죄악과 과실(過失)의 근본과 지엽(根本枝葉)을 여지없이 불사르게 될 때에 예배당 내외 전체는 불꽃의 열기가 차고 넘쳐 성신의 새 술에 취했고 형형색색의 죄가 다 쏟아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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