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논두렁 밭두렁에서 피어나는 보랏빛 주름잎은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지 않으면 바라볼 수 없는 아주 작은 풀꽃이다. 겸손한 사람들에게만 현현하는 꽃이라고나 할까, 가끔 무릎 꿇고 고개를 숙여 들의 꽃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묵상이 되는데. 이 작은 풀꽃, 혹 예수님 아니신가(실제 아가서에서는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예수님을 표현하기도 한다), 예수님께 영생이 있고 지극한 사랑이 있듯이 작은 풀꽃들의 아름다움이 어떤 크고 화려한 꽃보다 승하다는 것이다.

작아서 더욱 섬세하고 작아서 더욱 신비롭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할 수 있듯이 작은 것을 느끼고 바라보는 것 역시 천국으로 향하는 길 아닐까. 조금 더 확장을 해보자면 작은 꽃만이 아니라 작은 사람, 작은 교회는 어떤가?

두어 달 되었다. 양평에서도 한참 동안을 달려 산수유- 봄을 맞이하는 시춘목으로 유명한 개군면에 있는 계전교회 봉헌예배식에 갔다. 들에는 마치 손가락만한 길이로 모가 심어져있었다. 새로 심어진 논에 적응하기 위하여 성장을 멈추는 것을 벼의 몸살이라고 하는데 찰랑거리는 논물 속에서 누군가의 생명이 되기 위해 서있는 벼는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그런 논들을 앞에 두고 서있는 시골 예배당의 벼가 누군가의 생명을 위하여 몸살을 앓으며 성장하듯이 이 교회도 누군가의 생명을 위하여 여기 이렇게 서있는 것이다.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벼처럼 보이는 교회는 참 오랜만이었다. 내 어머니 허순덕 권사님도 행주치마에 벽돌을 담아 나르셔서 교회를 지으셨다. 내게 언제나 교회 하면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떠오르는 우산리 교회, 계전리 교회는 내 기억속의 교회처럼 그렇게 아늑하고 다정해보였다.

예배하면서 가만히 들어보니 세상에, 교회가 지어져 봉헌되기 까지 십년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 들꽃 들여다보듯이 깊게 들여다보니 누군가의 기도 속에 팔리지 않던 밭이 팔렸고 떠난 교인의 회심과 사랑도 자리했고 교회를 아끼는 신도들의 소리 없는 헌신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주님의 교회를 책임진 사명자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형식이나 예식이 아닌 진심어린 축하의 말씀 듣는 이들의 마음조차 뜨거워지게 했고 이제 다시 진정한 방주로 주 앞에 서게 되는 교회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축도하러 나오신 목사님께서 성령의 감동이 이끄신다며 교회를 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하자는 말씀에 정말로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 긴 세월동안 상처받은 자도 있었을 것이고 낙망한자도 많았을 것이며 예배당에 들어선 자보다 등 돌린 자가 많았을 거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벼가 몸살을 앓듯이 이 교회도 십년이란 시간동안 몸살을 앓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벼가 일어서듯이 이제 예배당도 굳건하게 자리를 잡은 것이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

작은 들꽃을 좋아해선지 이 말씀은 언제 읽어도 사무치게 다가온다. 들의 백합화는 아네모네를 말한다. 아네모네는 들풀이다. (누군가는 백합화가 무수한 풀꽃들을 지칭한다고도 했다) 실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하는 동안 아네모네를 보았는데 그 누구도 심지 않고 거두지도 않는 들에서 피어나는 들풀이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릴리, 들풀은 두 가지 매우 극적인 사안을 품고 있다. 하나는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비교되지 않는 아름다움이며 그러나 이 지극한 아름다움은 금방 아궁이에 던져질 정도로 허망하다는 것, 참으로 놀라운 인생에 대한 성찰이 아닌가.

아름다웠던 젊음은 한순간에 지나가고 우리는 이미 시들었다. 사유를 넓혀보면 예배당에 대한 적정하고 날카로운 상징이기도 하다. 화려하고 커다란 예배당 앞에서 입을 벌릴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수수한, 마치 풀꽃 같은 예배당 앞에서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놀라운 가르침이 거기 숨어 자리하고 있다. 들풀교회 계전교회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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