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 어려운 사역을 이뤄나가시나요?’ 생전의 테레사 수녀에게 기자가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의외였다. ‘하나님께 여쭈어봅니다.’ 기자는 이해를 못 하고 다시 물었다. ‘무엇을 여쭈시나요?’ 잠시 후 테레사 수녀는 ‘그분은 대답하시지요.’ 그리고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녀는 자리를 떴다. 마치 선문답 같은 대화였지만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답하였다. 깊은 경지에 이른 성인의 모습이리라. 

평소 존경하며 사랑하는 김창열 원로 장로님으로부터 글 청탁을 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장로님의 성품과 경륜 그리고 이뤄놓으신 업적을 생각하며 나는 테레사 수녀와 기자가 나눈 대화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 많은 세상 속에서 교회와 집안 어른이신 장로님께 나의 글을 올려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지 겸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두워지고 희미하여지는 육신의 한계를 테레사 수녀처럼 감추고 아끼시며 지혜의 삶을 추구하시는 장로님을 떠 올린다. 시니어의 한 줌 고독이 한 섬도 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의지를 마련하신 멋진 장로님을 생각하면서 글을 성의껏 만들어 봉정하고 싶었다.

‘서리 맞은 단풍이 봄꽃보다 더 붉다’는 시구가 있다. 동양적인 정서가 담긴 시였기에 나는 그 글에서 쉽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읽는 이에게 깊은 생각을 품게 했다. 푸르고 청청하던 나뭇잎들이 계절의 변화에 적응하여 붉은 잎으로 갈아입고 마지막 정열을 불사르는 모습을 바라보려니 그런 시를 읊게 된 것이 아닐까.

‘일몰이 일출보다 더 아름답고 황홀하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여서 저물어가는 생의 애환을 강변하는 시니어들의 애달픈 고백이었으리라. 장로님 내외분에게도 이런 잠재된 서글픔이 어느덧 곁을 지키고 있겠으니, 다양한 세대로 구성된 가족들에게 노추를 보이지 않고 화려한 봄꽃보다 사색이 깊이 담긴 붉은 단풍처럼 여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기도한다.

적당한 운동으로 산책을 즐기시는 장로님을 뵈면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정확한 산책을 어김없이 즐기며 학문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등나무 지팡이를 짚고 쾨니히스베르크의 보리수나무 우거진 숲을 명상하며 산책하는 5척 단신 칸트의 전기를 보며 장로님을 연상한다.

전후 치열한 생존경쟁 속에서 근면과 성취 그리고 극복의 덕목을 잘 이루신 장로님이셨으니, 칸트처럼 깊은 학문적 수업은 못 받으셨어도 산책을 즐기시는 장로님의 가슴 속에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바랄 것인가? 그 절실한 명제를 담아 기도하며 건강을 지키시는 모습이 그려진다. 남겨진 열정을 불태우시고 더 풀어야 할 숙제를 잘 정리하여 더욱 존경받고 칭찬 듣는 장로님이 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자녀 손들을 잘 키우신 장로님께 드리고 싶은 작은 소망이 있다. 숲을 붉게 물들이던 나뭇잎들도 때가 되어 저물면 땅에 떨어져 쌓이고 마침내는 한줌의 부엽토(腐葉土)가 되기 마련이다. 그 썩은 나뭇잎들은 숲을 울창하게 키우는 밑거름이 되어서 자연을 아름답게 성장시킨다.

장로님의 초록 봄과 청청하고 날렵하던 여름 그리고 붉던 열정의 가을이 지나면 떨어진 나뭇잎들은 그 나무의 발등상을 덮어주어 겨울이 춥지 않도록 보호하여 준다. 그렇게 해가 자나가면 부엽토가 되는, 흙으로 돌아가는, 창조주 하나님의 변함없는 섭리를 꼭 잊지 마시기를 감히 부탁드리고 싶다.

우리 모두 한 줌 부엽토가 되어야 하는 의미를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착각하며 준비 없이 허송하다가 돌아갈 길을 잃게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시대이다. 추한 모습을 연출하는 시니어의 무절제는 바람직하지 않다. 존경하는 김창열 장로님이 준비하여 놓으신 부끄럽지 않은 부엽토로 가는 길, 그 내역을 조금은 알 수 있는 철없는 후배는 감히 격에 맞지 않는 글로 장로님의 명예를 훼손 않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장로님 권사님 행복하세요.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