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이삭

이성훈 목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녀에 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창 12:2)라는 약속으로부터 시작하여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창 22:17)며 후손에 대한 약속을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중차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기도 외에 이삭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창 25:21). 그런데 이삭이 ‘기도했다’는 말이 ‘아타르’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온 몸에 전율이 흘렀습니다. 왜냐하면 ‘간구했다’(히. 아타르)란 말에는 단순히 ‘기도하다’란 뜻을 넘어서는 또 다른 뉘앙스를 담아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하다’라는 말에 상응하는 히브리어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히트팔렐’이라고 하는 말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표현들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1장 10절에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때 사용했던 표현이 ‘히트팔렐’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여호와께 기도했다”(창 25:21)고 하였을 때 사용한 히브리어는 ‘아타르’라고 하는 매우 드물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본래 ‘희생제물’과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 자체가 희생제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이삭이 자신의 아내 리브가를 위해서 얼마나 헌신적으로 기도를 했는가를 보여 주기에 충분합니다. 사실 이 표현은 이삭의 이미지와는 잘 맞지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삭이 온유한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이삭은 우유부단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이 파 놓은 우물 문제로 인하여 다툼이 생기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는 류(類)의 사람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볼 수 있는 소위 근성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자신의 성품을 어느 정도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그의 성품상 그의 믿음생활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우물포기 사건을 통해 어느 정도 가늠케 합니다. 그래서인지 성품의 소유자인 이삭이 “여호와께 간구했다”(히. 아타르)는 표현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가 간구했다”(히. 아타르)는 말은 그 동안 알고 있었던 이삭의 전체 이미지를 바꾸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해 걸림돌이 될 수 있는 불임을 위하여 ‘간구했다’(히. 아타르)는 말은 비록 그는 세상 것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했을지 모르나,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관한한 목숨을 걸 줄 아는 사람”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이삭은 결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기꺼이 손해 볼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관심사는 오직 언약의 성취, 곧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아내 리브가가 자녀를 가지지 못하자 그는 사생결단을 하고 하나님께 매어 달렸으며(히. 아타르), 끝내는 기도의 응답을 받아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 성취의 걸림돌을 제거했던 사람입니다. 위대한 역사에는 항상 위대한 헌신의 제물이 있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 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우리교단에도 하나님을 향한 ‘아타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대한민국 기독교에 위대한 ‘아타르’가 생겨나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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