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지역과 삼천포, 통영지역 선교활동

김해군 생림면의 봉림전도관은 원래 장로교회가 있다가 실패하고 해산된 곳이었는데 동양선교회 지방전도대가 열심히 전도한 결과로 결신자가 생겨났다. 1919년 3월 20일에 김창회가 교회를 설립하고 여교역자 이소희와 함께 노방전도에 힘쓰는 등 교회가 진흥되어 1920년 5월에 예배당을 새로 건축했다. 이 교회가 현재 생림교회이다.

봉림교회는 1928년에 김해읍내에 전도활동을 펼쳐 60여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총회에서는 이영우 전도사를 봉림교회 담임으로 임명하여 김해읍내에 순회지를 정하고 김해에 복음전도의 교두보를 구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녀교역자의 불미스런 관계와 이영우 전도사의 불법으로 인해 교회가 큰 타격을 받게 되었으며 총회는 1929년에 김광준 전도사를 파송하여 교회를 안정시켰다.

김해에 최초로 복음을 들여온 것은 1893년 김해출신 배성두(裵聖斗)가 부산에서 복음을 접하고 고향 김해로 돌아와 전도하여 10여명이 믿게 되면서 교회가 세워졌다.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김해장로교회는 초기에는 미국과 호주의 선교사들이 시무를 맡았고 1913년에 가서 한국인 김천일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김해장로교회에 시무하던 선교사들은 1900년대 초에 교회 바로 옆에다 소학교를 설립하여 초기교육에 이바지 했으며 이것이 오늘의 합성 초등학교가 되었다. 

김해읍성결교회의 창립주역은 장로교인 김병우 집사 외 38명의 교인이었다. 1927년 9월 무렵부터 김해장로교회가 양분되어 일부교우들이 그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이기선 목사와 함께 김해장로교회를 떠나 별도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여러 해 동안의 분규로 경남노회와 김해장로교회의 이기선 목사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있었고 이 대립은 일부 경상도기독교인들이 이북출신 이기선 목사를 배척한다는 남북갈등문제로 비화되어 감정적인 갈등이 일었다.

당시 인근 마산문창장로교회에서도 분규사건이 있었는데 그 교회 박 모 목사가 여자문제로 당회에 사표를 낸 것이 계기가 되어 33명의 교인들이 장로교를 탈퇴, 독립교회를 설립했던 것이다. 이때도 박 모 목사가 평남 덕천출신이었기 때문에 교계에서 이 문제가 남북갈등문제로 비화되어 파문을 일었는데 김해장로교회 분규도 사실여부를 떠나 남북갈등문제로 이해됐던 것이다.

당시 경남노회에서는 임시노회를 열고 이기선 목사와 김병우 집사 등 평신도대표 4인에게 그 동안 경위와 양측의 입장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 이기선 목사가 사표를 제출하였고 김병우 집사 등 38명은 교회분규의 아픔을 겪은 후 김해장로교회에서 탈퇴, 1929년 2월 15일에 김병우 집사의 자택에서 39명이 이기선 목사를 모시고 개척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이기선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했으나 경남노회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1929년 4월 15일에 김해읍 부원동 845번지의 1에 소재한 김병우 집사의 창고를 개조하여 김해읍성결교회란 이름으로 창립예배를 드림으로 김해에 성결교회가 처음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창립 즉시 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단에 소속을 한 것이다.

삼천포교회 역시 지방전도대의 대활약으로 세워진 전도관이었다. 1920년 6월에 지방전도대가 이곳에 2주 동안 머물면서 천막을 치고 전도했는데 그 결과로 7~80명의 구도자가 일어나게 되었다. 동양선교회는 이곳에 최홍상을 파송하여 사역하게 하였다. 삼천포교회는 그 후에도 많은 노방전도로 부흥되었다. 1929년에는 수양리에서 노방전도로 67명을, 1931년 팔포 지교회에서 매주일 금요일마다 전도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시키고 그해 수양리에서 구도자가 많이 일어나 예배당을 지었고 고성 와룡리에도 지교회를 설립했다.

통영전도관 역시 지방전도대의 열매였다. 1920년 5월 20일 민라 선교사가 전도대를 인솔하고 2주간 천막전도를 한 결과 구도자가 70여명이 생기게 되었다. 동양선교회는 김하식을 파송하여 한옥 한 채를 매입하여 정식으로 전도관을 개척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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