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형은 목사(서울제일지방, 성락교회)
부활은 무서운 싸움을 거쳐서 찾아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 들어가신 십자가의 길은 제아무리 상상해도 그 실체를 다 알 수 없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의 고통을 가장 잘 묘사한 작품이 아마도 2004년에 개봉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일 것이다. 감독 멜 깁슨은 18세기 독일 신비주의자 앤 캐서린 에머리히(Anne Catherine Emmerich, 1774-1824)의 책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읽고서 영화를 제작했다. 12년이 걸렸다.

이 영화는 예수의 수난을 다룬 이전의 틀을 과감하게 깼다. 인간 예수의 고통을 아주 현실적으로 적나라하게 그렸다. 피를 흘리는 모습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는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채찍에 맞아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장면을 길게 잡는다.

이 영화를 보다가 너무 끔찍한 장면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도 여럿 있었을 정도다.

그러나 이 영화도 예수 고난의 성서적 의미를 다 전달해주지는 못한다.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지옥까지 내려가신 (전통적인 사도신경에 나오는 음부에 내려가심에는 해석이 여럿이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을 어찌 다 설명하랴.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온전히 하나이신 성자께서 하늘 아버지에게서 버림을 받는 그 상황은 적나라한 육체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힘이 없어서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닌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분은 스스로 십자가의 길로 걸어 들어가셨다. 사탄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게 함으로써 일시적인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니다. 정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가르침을 깊이 묵상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린 분은 성자 하나님이셨다. 성자께서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져가며 영혼이 멸망으로 빠져들 때 하늘 아버지는 침묵하셨다. 돌아앉으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를 기록한 이 구절은 시제를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시제가 과거다. 이 절규를 외칠 시점 이전에 하늘 아버지께서 이미 당신의 아들을 버리셨다. 당신의 아들에게 창세 이후로 인류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다 쏟아 부으셨다. 사람이 받을 형벌이 그만큼 컸다. 당신의 영원하신 아들을 죽음 저 심연으로 내어버릴 정도로!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늘 아버지는 당신의 사랑을 사람, 사람들에게 다 부으셨다.

부활은 이토록 무시무시한 싸움을 거쳐서 찾아왔다. 부활은, 당연한 말이지만, 승리다. 악에 대한 결정적이고 최종적인 승리다. 악의 도구인 죽음과 죄에 대한 영원한 승리다. 그런데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건네신 인사와 축복이 평화다.

“평안하냐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기독교의 부활은 승자의 혼미가 시작되는 지점이 아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활의 승리는 교회의 승리가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성취가 아니다. 사람은 부활 사건에서 가없는 은혜를 입은 존재일 뿐이다. 부활의 승리 그 전권을 쥐신 분이 평화를 말씀하신다.

2018년 부활절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이 날카롭다. 주님의 뜻은 분명하다.
부활을 빙자하여 호전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처절하고 무시무시한 싸움을 거쳐서 부활이 발생했지만, 부활의 시점 이후의 메시지는 평화다.

남북의 분단과 이로써 발생한 한반도의 상황은 세계사의 중심 문제가 되었다. 한국 교회가 부활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겸허할 일이다. 조금이라도 부활을 제 것인 양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부활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은혜다. 우리가 부활에 보탠 것은 없다.

4월부터 시작되어 이어질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이러저러하게 만날 대여섯 정상들의 만남들에 하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자. 부활과 평화의 변증법 그 기적을 오늘 여기에서 체험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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