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초의 서울신대 어느 강의실, 현대신학을 강의하던 교수가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을 소개하였다. “현대는 성숙한 인간의 시대이기에 이 시대가 복음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성서의 비신화화가 필요하다고 하면서 불트만은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제자들의 신앙이 부활을 체험하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라고.

▨… 한 순간 강의실에는 정적만 흘렀다. 그러나 곧 소동이 벌어졌다. 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그 질문의 대부분은 부활의 역사성을 긍정하지 않는 불트만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신약신학의 대가라 할지라도 사중복음의 성결교회 신앙으로는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강의실은 불트만 성토장이 되었다.

▨… 교수는 그 학생들에게 대답 대신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교리로서 믿습니까? 아니면 신앙의 실천적 차원에서 믿고 있습니까?” 본회퍼를 인용하며 교수의 질문은 속사포처럼 이어졌다. “본회퍼는 부활 신앙은 부활하신 분만이 가능하게 해주고 역사적 존재로서의 그분에게 이르는 길도 그분만이 지시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본회퍼의 이해가 성결신앙과 차이가 있는가를 물었다.

▨… 김재준의 부활은 알아야 하는 교리이면서 동시에 삶 속에서 그 믿음이 실천되어야 하는 교리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전존재를 남을 위한 속죄제단에 던졌습니다. 셋째날이 왔습니다. 해답이 왔습니다. 죽음이 생명의 삼킨 바 되었습니다. 생명이 이겼습니다.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의 좁고 험한 입구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속죄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그 대답이 부활입니다.”(김재준,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지금 곧 나의 삶 속에서 스스로를 입증하는 그리스도를 만난다면 예수 부활의 역사성은 애초에 질문거리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교리를 믿느냐 안 믿느냐로 싸움하면서 교회는 언제나 그 교리의 실천은 외면해왔었다. 니버(R.Niebuhr)가 지적했듯이 지금, 여기에 계시는 그분을 믿는다면 교회는 분명히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 부활의 역사성 위에 서있는 우리 성결교회는 언제쯤이면 그분의 부활을 말이 아니라 실천적 신앙으로 증언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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