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의한 것을 거부하고 불평등한 것에 항거하며 스스로 낮아짐의 신분으로 가장 미천한 자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 가장 낮은 자들의 신랑이 되신 예수의 비밀은 무엇일까? …아무리 성서를 뒤져봐도 예수는 배고프고 고달픈 백성들을 옆에 두고 자기 길만 가는 사람이 못되었으며, 자기 옆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과 죄짐을 두 어깨에 무겁게 지고 죽음의 골짜기에 오른 사람이었다.”(고정희, ‘새롭게 뿌리내리는 기독교 문화를 위하여’)

▨… 모든 사람들이 윤락녀라고 손가락질하는 ‘소냐’를 도스토예프스키는, “하늘색 눈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선량하고 티없는 표정을 지닌 신앙의 여인”이라고 그렸다. 그 소냐가 시베리아로 유배된 ‘로쟈’(라스콜리니코프)를 따라가 인간의 참된 사랑과 헌신을 보여주었을 때 로쟈도 다른 죄수들도 진정한 인간됨에 눈을 뜨게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통해 보여준 구원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밑바탕이었다.

▨… 고정희 시인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이해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온몸으로 실천함에서 비롯되어졌다. 곧 고난의 원인은 사랑이고 고난의 본질도 사랑이다. 사랑이 원인이 아닌 고난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흉내내거나 위장하려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감추는 위선의 신앙일 뿐이다.

▨… 그 위선의 신앙이 넘쳐나는 한국교회를 보며 고정희는 뼈가 으스러지도록 기도했다. “우리가 저 대지의 주인일 수 있을 때까지/재림하지 마소서/그리고 용서하소서/신도보다 잘사는 목회자를 용서하시고/사회보다 잘사는 교회를 용서하시고/제자보다 잘사는 학자를 용서하시고/독자보다 배부른 시인을 용서하시고/백성보다 살쪄 있는 지배자를 용서하소서”(야훼님 전상서)

▨…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년간의 고독’에는 전염성 기억상실증이라는 말도 안되는 병이 등장한다. 주민들은 이 병에 감염되면서 너나없이 기억을 상실한다. 보다 못해 한 젊은이가 사물의 이름을 꼬리표로 단다. 마지막으로 마을 입구에 세운 큰 표지판에는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라고 적었다. 성결교회가 마르께스의 마을일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고난에의 초대(벧전2:21)를 잊지도 외면하지도 않는 교단 아닌가. 그러나 작금의 교단 상황은? 차라리 전염성 기억상실증에라도 감염되었으면 하는 성결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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