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와 밀양 지역 선교 활동

지방전도대는 부산에서 북진하여 동래에서 집회를 가졌다. 동래는 약 1만 명이 사는 도시로 불교가 매우 강한 지역이었다. 동양선교회는 1918년 9월 이곳에 한옥을 수리하여 전도관을 세우고 부산교회의 박제원 전도사를 파송하여 두 전도관의 사역을 겸임하게 했다.

박제원은 동래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동래를 오가며 복음을 전하기에 매우 바빴다. 그러나 그는 바쁠수록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 개척전도가 자기의 사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동래는 원래 불교의 근거지여서 전도하기 쉽지 않았으나 그는 특별히 어린이를 사랑하고 인도하는 달란트와 교회개척에 대한 사명과 은사가 있어서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후에 교단의 지도자인 김정호 목사와 김기삼 목사가 바로 이 동래교회의 출신이다.

그런데 박제원 전도사는 1919년 부득이한 사정으로 성결교회 전도사 직분을 사직하고 장로교회의 전도사로 전적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성결교회사가인 이응호 박사는 안수문제일 것으로 추측한다. 또 한 가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3·1운동과 관련된 것으로 추측된다.

동래에 파송한 다음해인 1919년은 3·1운동이 있었던 해였다. 청년 김기삼이 학생시절에 동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때에 삼일만세운동에 가담하여 1년 6개월의 감옥생활을 했다. 그렇다면 1919년 3·1운동 당시에 개척자인 박제원 전도사도 만세운동에 관련되었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당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교적을 임시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장로교 전적이 부득이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듬해인 1920년에 다시 성결교회로 돌아와 성결교회의 가장 중요한 교회인 무교동교회 주임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일제 때 말도 못하게 고문을 많이 받았다는 말을 그의 손자인 박노천 장로(서대문 성결교회)가 그의 어머니에게 들었다고 증언한다.

1932년에는 동래교회는 구령회를 조직하여 매주 금요일 낮에는 축호전도를 하고 밤에는 구령회로 모였다. 또한 남녀성도들이 총출동하여 전도한 결과 안용인 등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큰 성과를 거뒀다. 지방전도대는 동래와 더불어 밀양을 교회개척의 중요대상으로 생각했다. 밀양은 이미 장로교회에서 여러 번 교회를 개척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였고 겨우 한 교회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인구 2만의 밀양은 경상도에서 가장 선교하기 어려운 곳으로 소문나 있었다. 동양선교회로서는 그곳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한 복음전파를 포기할 수 없었다. 지방전도대는 밀양에서 박해를 극복하고 약 한 달 동한 천막전도를 진행했다. 밀양의 남녀노소들이 천막전도 집회소로 몰려들었고 드디어 밀양전도관이 탄생했다.

1928년 밀양교회에서 신유의 권능이 나타나 그 결과로 김창윤과 그의 가족 전체가 주께 돌아왔고, 핍박이 극심한 남편을 감동시켜 그 아들까지 믿게 된 성도, 산중바위굴 속에서 기도하다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시련을 이겨낸 성도, 보통학교 훈도와 금융조합 서기 등 지방의 유지들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동료들까지 인도한 일과 매주 월요일에 소아집회를 열어 주일학교 재적 83명을 확보하는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밀양일대에 성령의 큰 역사가 임하기 위하여 새벽기도회를 계속하는 등 많은 재미가 있었다. 1930년에는 1년 동안에 개인전도에 힘써 1406명을 얻는 성과를 얻었고 이 여세를 몰아 남포리교회를 개척하는 등 크게 부흥하고 있었다.

그해 진주교회에서는 노방전도, 시장전도, 축호전도에 열중하여 결신자 225명을 얻었고 76명의 신자가 증가하였다, 부흥회를 통해 성령의 불이 일어나 인근교회까지 그 열기가 확산되는 등 성결의 복음이 경남지역에 확산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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