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남쪽 바다 너머로 막 올라오던 지난 2월 16일 오전 10시 30분 한국 천주교 최초로 당시 가장 젊은 나이의 추기경에 서임된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매스컴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뉴스 매체의 머리기사는 온통 선종 소식과 장례 일정 그리고 그 분의 삶의 내용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제자로 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소식을 전하고, 가르치는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동질 의식 때문이었는지 추기경의 선종 소식은 제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올려진 것은 그 분의 세례명처럼 또 한 사람의 스테파노로 살다가 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천여 년 전 초대교회의 스데반(스테파노) 집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임으로 승리감에 도취한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을 향하여 열정적인 설교를 하는 바람에 기독교의 첫 순교자가 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87년의 삶 속에서 하루하루를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서 생활의 순교자로 살아 그 분의 세례명에 어울리는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도 편하고 쉬운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저를 조용히 나무라는 듯 했습니다.

또 그 분의 실천적인 종교인의 삶이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 왔습니다. 얼굴에 가득한 인자함이나 조용한 미소가 그 분의 삶과 인격을 그대로 나타내 주었습니다. 가장 좋아하는 자화상 그림이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나 사진이 아니라 어느 지적 장애를 가진 어린 아이가 도화지에 그려 준 그림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그린 자화상을 보며 ‘바보야’라고 적어 넣으시며 “있는 그대로 인간으로서, 제가 잘 났으면 뭐 그리 잘 났고, 크면 얼마나 크고,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안다고 나대고, 어디 가서 대접받길 바라는 게 바보지. 그러고 보면 제가 제일 바보같이 산 것 같아요.”라고 하신 그 말씀 앞에 고개가 숙여 집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찾아가서 그들과 함께 살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참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소외당하고 있는 이들을 찾아가 위로하시며 손잡아 주셨던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다시 태어나면 추기경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하셨던 참 인간적인 분이셨습니다. 오늘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높은 자리에 있고자 하고, 섬김 받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고, 지식과 업적을 자랑하고자 하는 저를 무척이나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또 그 분의 중보적인 삶이 많은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유신 정권 앞에서도, 군사 정권 앞에서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으셨고, 과격한 시위대 앞에서도 당신이 해야 할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진보와 보수 어느 한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고, 모두를 이해하며 동시에 모두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던 분이셨습니다. 1973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리던 그 사형수의 어린 아들을 보시고 추기경은 석방을 위해 정부와 직·간접적으로 대화에 나섰고, 끝내 그들의 석방을 이끌어내기도 하셨습니다. 이 일을 경험한 사형수의 아들은 추기경의 선종 소식을 듣고, “그 때 만일 아버지가 처형이 됐으면 아마도 영혼이 갈가리 찢겨졌을 것이고,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테러리스트가 되어 있었을 것”이라며 추기경은 자신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인터넷에 글을 남겼습니다. 잘못된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권을 위한 조찬 기도회를 인도하고, 그 권력자들 앞에서 예배를 인도한 것을 자랑삼아 떠벌리고, 결국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싶어 하는 오늘 개신교의 지도자들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육신을 이 땅 한 구석에 남기고 떠나시는 모습이 옷깃을 여미게 하였습니다. 남기신 유언에 따라 선종하신 후 즉시 두 눈의 각막으로 이 땅에서 어둠 속에 살아가던 두 사람이 빛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 분의 두 눈을 단지 두 사람에게 빛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선종하신 후에도 살아 있는 눈으로 당신이 떠난 후의 세상을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신 육신을 평생 감사함으로 사용하고, 떠날 때에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른 이에게 남겨 주심으로 빛을 잃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빛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종교 지도자이지만 소유가 삶의 질과 업적을 가늠한다고 믿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소유하도록 빌어주며, 세상적 축복을 남발하고 또 스스로 갈망하는 제 삶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아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용하고 조촐한 장례를 애써 당부하시며, 섬겨주던 주위 분들에게 당신을 섬겨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사랑한다는 말씀을 남겨 주셨다는 소식에 저는 끝내 한 줄의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언젠가 에베소에 있는 요한 기념 교회를 방문했을 때 임종을 앞둔 사도 요한이 강단에 서서 마지막으로 당부한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었다는 가이드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보수와 진보, 가진 자와 가난한 자, 힘 있는 자와 소외된 자들 가운데 서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며 떠난 추기경의 말씀이 오늘 제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남쪽 바다를 지키며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선종과 장례를 멀리서나마 묵묵히 바라보면서 마음에 다가오는 봄날 따뜻한 바람을 대하듯 그 분의 영정 앞에 섭니다. 그리고 이렇게 인사드립니다. “이 암울한 시대에 우리 곁에 계셔 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추기경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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