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음악회를 다녀왔습니다. 국내 남자 성악가들 80여 분이 무대에 함께 서는 솔리스트 앙상블이었습니다. 젊은 교수부터 백발이 성성한 교수까지 연령 계층이 다양해 보였습니다. 카운터 테너, 테너, 바리톤, 베이스 특히 베이스의 그 낮은 저음들은 바다 속 저 깊은 곳에서 거대한 바다가 통째로 움직이는 듯한, 힘과 에너지, 그리고 남성들만이 낼 수 있는 포효 같기도 했습니다.

합창을 하려면 원래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해요. 자신만의 개성이나 색깔을 지니고 있으면 하모니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겠지요. 하모니를 위해 자신을 버린다. 자신을 버리면서 합창 속에서 새로운 나를 얻는다.

가만 궁구해보니 합창만 그럴까요. 가정에서도, 우리가 속한 사회 집단에서도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결국은 자신을 많이 버리거나 낮추는 자만이, 사람도 얻고 사랑도 얻고 더불어 자신도 얻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말이지요. 우리 안의 감정들도 각양각색의 모습들입니다. 거칠고 상스러운 소리도 있고 너무 연약하거나 게으른 소리도 있어 서로 하모니를 이루어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작은 소리는 키워야 하고 큰소리는 줄여야겠지요. 거친 소리는 다듬어야 하고 게으른 소리는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도 상치 않고 남을 해치지도 않습니다. 합창을 하다보면 작은 소리 내기가 어렵다는 것은 시사해주는 바가 참으로 많습니다. 

솔리스트 앙상블 중간 중간에 솔로가 가끔 이어졌습니다. 곡이 끝나고 나서 그 솔리스트에게 모든 단원들이 따뜻한 박수와 엄지손가락 치켜들기, 그리고 포옹등, 다양한 ‘인정법’이 보였습니다.

제게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인간관계, 무엇보다 서로를 인정해주는 따뜻한 그들만의 언어로 보였습니다. 어느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가장 애로점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제2 바이올리니스트의 확보라고 했답니다.

누구나 다아 제1을 원하지 약간 가려진 제2를 원하지 않는다고요. 그러나 엄밀하게 이야기 한다면 제2가 있기에 제1도 될 수 있는 거고 제2가 내는 화음이 있기에 제1의 멋진 비약도 있을 수 있는 거지요.

황새는 아주 멋진 새입니다. 길고 하얗고 날씬하니 말이지요. 하지만 황새의 걸음걸이가 주마간산이라면 뱁새는 어떨까요. 황새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꽃다지가 뱁새를 바라보며 안녕! 을 할 것이고 뱁새는 느긋하게 작은 꽃들과 눈 맞춤 하면서 여여한 삶의 시간을 즐길 수가 있을 겁니다.

주름잎은 아주 이른 봄부터 피어나기 시작하여 늦가을까지 줄기차게 피어나는 아주 작은 야생화입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미의 아름다움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빛깔과 생김새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물론 ‘다름’을 인정하는 눈길 아래서 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 ‘다름’이란 것이 실력의 편차일수도 있고 미모의 서열, 체격의 등급일 수도 있으며 혹은 교회의 사이즈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잘하면 잘한 대로 아름다우면 아름다운대로 멋지면 멋진 대로 큰 교회는 작은 교회를 작은 교회는 큰 교회를 인정해주자는 겁니다. 오케스트라의 제 1바이올린과 제2 바이올린처럼 그 하는 일이 다를 뿐이지요. 즉 다름은 인정하는 것, 이게 바로 공존의 시작이면서 아름다움의 극대화입니다.

한해가 저물어가니 그리고 저물어 가는 삶 앞에 서니 언감생심 남까지 조율해내는 지휘자는 못되더라도 적어도 내 안의 소리만큼은 조율해 낼 수 있는 지휘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 정점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 그 누구이던 간에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라는 말씀을 우리 삶의 텍스트로 삼고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다름을 인정하는 세련된 평등의식을 학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남들 보기엔 보잘것없는 나일지라도, 내 자녀일지라도, 내 교회일지라도,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내가 아름다워, 내 자녀가 아름다워, 내 교회가 아름다워,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내 곁에 다가오는 수많은 사람들도 아름답게 여겨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런 사람이 많아야 아름다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세모時라 둥근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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