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자카르’

이성훈 목사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 가운데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외로움이라고 하는 감정입니다. 이 외로움의 감정은 사람들에게 잊혀짐에서부터 시작이 되는 듯 하지만, 본래 외로움은 원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에서 기인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으시고 돌보지 않으신다고 느끼는 감정만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홍수 심판 이야기는 사실 하나님과 분리된 인류에 대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아의 홍수를 떠올릴 때마다 ‘심판’만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단지 성경에서 주고자하는 중심 메시지는 단지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신다는 내용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 중에 교차대조법적 구조(Chiastic)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 맥락 중 가장 핵심적인 내용과 대표적인 단어를 그 이야기의 한 가운데 위치시킴으로써 그 메시지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을 명확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홍수 이야기에서 중심 단어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 8장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기억하셨다’라고 하는 용어입니다.

물론 홍수심판 이야기는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상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창 6장 5절에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였고 말씀합니다.

가인의 후손 라멕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니겠습니까! 라멕은 어느 날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라고 할 만큼 그는 폭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목숨과는 상관이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만큼 그는 잔혹했습니다. 이처럼 포악하고 절망적인 인류의 종국은 멸망과 심판뿐이었습니다. 희망이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가 있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속성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멸망당하도록 내버려 두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멸망하고 파멸되었어야 할 우리를 내버려두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를 ‘기억’(창 8:1)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기억’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자카르’는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를 잊었다가 다시 생각하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 그런 의미였다면 ‘생각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하샤브’라고 하는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라는 의미의 ‘자카르’라는 말은 “늘 마음에 되새기고 품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살다보면 힘들고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자리에 처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5)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젖먹이를 잊는 여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젖먹이를 잊는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우리를 ‘자카르’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당황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우리의 하나님 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기억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귀한 예수님의 은혜가 직접 느껴지고 만져져 오늘도 희망찬 내일을 꿈꿀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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