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가 눈앞에 있는 회중의 필요를 의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설교가 대화라면 그리고 회중을 대화의 파트너로 상정한다면 그들의 바람을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회중의 요구와 필요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허공을 치는 설교’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주안점은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대화 파트너에 대한 분석에 있지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데 있지는 않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회중들은 졸음이 오지 않는 설교를 요구한다. 졸게 만든다는 것은 설교의 내용과 사용되는 언어의 진부함으로 회중의 듣고자 하는 열망을 충족시키지 못함을 의미한다. 회중은 설교자의 자연스러움을 기대한다. 즉 인위적인 허세와 과장된 태도, 진솔하지 못한 설교자의 태도를 회중이 원치 않는다는 이야기다.

둘째, 회중은 자신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갖는다. 이것은 설교가 너무 학문적이거나 심오한 사상을 다룰 경우 그리고 실천 불가능한 극단적인 요구를 할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설교에서 실제적이면서 본질적인 테마를 기대하는 것이다. 설교가 한 주간에 발생한 사건들을 쫓아다니는 시사보고서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도외시해서도 안 되며, 반대로 너무 깊은 신학적 성서적 내용으로 몰입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본문말씀/교리의 깊이를 다루는 작업으로서의 설교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됨을 의미한다.

셋째, 회중은 성경본문을 현실과 접맥시키는 설교를 요구한다. 즉 회중은 설교자가 본문의 인물이나 사건을 ‘나와 상관없는’ 내용으로 객관화시키게 되면 은혜를 받지 못한다.

넷째, 회중은 자신들의 문제를 함께 나누는 설교자를 원한다. 그들은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 회중들의 어려움과 상황에 동참할 뿐 아니라 설교단 아래에서도 그들의 어려움과 상황을 함께 나누길 원한다. 권고와 권면 일변도의 설교자도 회중이 거부한다.  설교의 내용이 언제나 잘못을 지적하고 죄의 문제를 거론하며 공격적인 설교자를 회중은 기피한다. 이런 맥락에서 위로와 권면은 설교의 양 날과 같다. 흥미로운 것은 도시교회일수록, 그리고 교회 규모가 클수록 설교에 대한 기대치가 크고 따라서 설교자의 전문성에 대한 요구가 높다는 것이다.

회중의 요구를 흑백의 논리로 볼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그들의 요구가 다 옳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회중없는 설교는 없다는 것이고 어느 설교자도 예배당의 벽을 보고 설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회중을 읽는 설교자는 그만큼 더 큰 기회를 가진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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