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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현장을 가다 - 칼뱅의 종교개혁
칼뱅, 유럽 전역으로 종교개혁 확산 시켜
[1111호] 2017년 11월 08일 (수) 16:46:41 조재석 기자 webmaster@kehcnews.co.kr
   

제네바 종교개혁기념공원의 파렐, 칼뱅, 베즈, 낙스의 동상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종교개혁이 시작됐다면, 칼뱅은 유럽 전역으로 종교개혁을 확산시킨 인물이다. 특히 '개혁(파)교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칼뱅의 종교개혁 정신은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영국 청교도와 미국 장로교회를 거쳐 한국으로 전해져 오늘 한국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린 시절 신앙의 토대 누아용
칼뱅은 1509년 프랑스 북부의 도시인 누아용에서 태어났다. 칼뱅의 아버지는 대성당 참사회의 간부였고, 어머니는 어린 아들과 함께 수도원을 자주 방문할 정도로 경건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칼뱅은 주교 자녀들과 함께 대성당 안팎을 놀이터 삼아 뛰어 놀았을 것이다. 라틴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성가대원으로도 일했고 1521년 성직록에 이름을 올린 후 예배 돕는 일도 하게 된다. 이곳에서 칼뱅은 중세의 경건성과 부모의 신앙열정을 물려받아 종교적 큰 일꾼이 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성당 소예배실에서 단 한 줄의 칼뱅을 만날 수 있었다. 교회 역사 안내판에 ‘1509년 종교개혁자 칼뱅이 누아용에서 태어났다'는 문구가 있었던 것. 한 줄이라 아쉽지만 칼뱅은 그렇게 누아용에 남겨졌다.

배움의 터전인 파리
칼뱅은 14살인 1523년 만스펠트를 떠난 루터처럼 고향을 떠나 파리로 왔고, 마르세대학에서 라틴어 문법을 공부했다. 이후 몽테규대학에 진학해 5년간 인문학을 공부한 그는 석사학위를 받게 된다. 당시 몽테규는 금식훈련과 밤중까지 진행된 영성훈련 등 엄격하고 보수적인 운영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에서 칼뱅은 중세교회의 경건과 학문을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 칼뱅은 신학을 배워 신부가 된 것이 아니라 법학을 공부했다. 지금 몽테규 대학은 시민을 위한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칼뱅이 살던 파리에서 주목할 것은 이곳이 아닐지도 모른다. 법학을 공부한 오를레앙과 부르쥬에서 종교개혁적 정신을 가슴에 품게 됐기 때문이다. 오를레앙은 루터의 영향을 받은 독일 유학생과 교수들이 많았고, 부르쥬는 종교개혁자 편에 선 마르가리타 나바라의 왕비가 후원했기 때문에 인문주의와 루터의 종교개혁적 정신이 확산되던 장소였다. 이곳에서 칼뱅은 종교개혁을 배우고 확신을 갖게 됐을 것이다. 실제로 칼뱅은 ‘시편주석' 서문에서 아버지에 뜻에 따라 법률공부로 방향을 바꾸고 난 후, 1535년 ‘기독교강요’ 저술 전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종교개혁 사유를 배운 칼뱅은 뜻하지 않게 종교개혁가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친구들과 함께 파리대학 학장에 취임한 콥의 연설문을 작성했다. 하지만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글을 포함한 연설문은 당시 교회와 대학 운영자들의 노여움을 샀고, 그들은 파리를 도망치듯 떠나야 했다.

칼뱅은 파리를 떠나 종교개혁자를 보호하던 나바라 왕비의 땅, 프랑스 남부로 피신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인문주의 종교개혁에 나섰던 르페브르와 루설 등을 만난다. 어쩌면 젊은 학자인 칼뱅은 미래의 종교개혁을 꿈꾸며 선배들의 격려를 받았을 것이다. 이때 칼뱅은 자신의 방향을 확고히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꿈은 프랑스에서 실현되지 못했다. 1534년 10월 가톨릭 미사를 비난하는 벽보사건으로 종교탄압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칼뱅은 결국 스트라스부르크를 거쳐 바젤로 피신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기독교강요'(1536년)를 저술, 세상에 종교개혁자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칼뱅이 목회했던 제네바 생 피에르교회

종교개혁 활동의 장소 제네바
‘기독교 강요'를 쓴 칼뱅은 더 많은 공부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 국경에 있었던 종교개혁 도시 스트라스부르크에 가려고 했다. 그런데 경유지인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자 파렐의 강권을 못이겨 이곳에 남게 된다. 그렇게 1536년 9월부터 그는 생 피에르교회의 바울서신들을 강의하는 교사(목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생 피에르교회의 전면은 로마 판테온처럼 매우 웅장했다. 하지만 교회 내부는 조각이나 장식, 성화가 거의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그곳에서 칼뱅이 4,000회 가까이 설교했다는 설교단과 그가 앉은 나무의자를 만났다. 당시 설교단은 아니지만 그는 묵상하며 준비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법학을 공부한 칼뱅은 츠빙글리처럼 강해설교를 했다고 한다.

생 피에르교회가 말씀의 장소라면 교회 옆 소예배당(칼뱅의 강당)은 강의와 신학토론의 장소다. 칼뱅은 이곳에서 강의했고, 매주 토요일 다른 목사들과 함께 성서주해를 실시했다. 그가 강의했던 이곳은 ‘낙스 채플’로도 불린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창립한 낙스가 5년여 영국인 망명자교회를 이끌었던 곳이다. 현재도 이곳에는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이탈리아 공동체가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망명자교회 설립은 칼뱅이 망명자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교회 옆 종교개혁 박물관을 찾았다. 10여 개의 공간에는 성서, 칼뱅과 제네바, 프랑스의 종교개혁 등 여러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많은 자료 중 가장 핵심은 당연히 칼뱅에 대한 것이다. 그의 흉상과 기독교강요 초판본, 죽음을 앞둔 그가 병상에서 동료들과 대화하는 장면은 칼뱅의 삶과 활동,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교회 인근에 있는 칼뱅의 집도 찾았다. 그곳에서 ‘칼뱅이 여기에서 1543년부터 1564년 죽을 때까지 살았다’라는 내용의 명패를 만났다. 하지만 칼뱅 당시의 집은 세월과 함께 헐렸다고 한다.

   

칼뱅이 설교했던 생 피에르교회의 설교단

칼뱅이 반대파들과 치열한 논쟁과 활동을 펼친 곳은 시의회였다. 이곳에서 그는 교회법을 제정해 제네바교회의 예배의식과 관습을 개혁했고, 시민법을 통해 제네바를 종교개혁 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시민을 위한 목사요, 지도자로서 활동한 시의회 마당에서 10년 넘게 치열하게 논쟁한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제네바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아무래도 ‘종교개혁의 벽'으로 불리는 장소다. 옛 도시의 성벽 아래에 만든 기념물은 칼뱅 탄생 400주년과 제네바아카데미 설립 350주년인 1909년에 착공해 8년 후 완공했다고 한다. 루터와 츠빙글리의 이름은 그의 영향 속에 제네바 종교개혁이 진행됐음을 알게 한다. 적힌 ‘1536'과 ‘1602'라는 숫자는 시의회가 종교개혁을 도입키로 한 해와 시의 자치권을 공고히 한 날이다. 벽의 정 중앙에는 4명의 동상이 있는데 파렐과 칼뱅, 베즈와 낙스이다. 파렐은 제네바 종교개혁을 시작했고, 칼뱅은 꽃피웠으며, 베즈는 계승했고, 낙스는 확산시켰다. 이들과 함께 독일과 프랑스, 미국과 헝가리 등에서 칼뱅주의를 확산시킨 이들의 모습도 있다. 그의 종교개혁 정신이 온 유럽에 확산 됐음과 종교개혁이 ‘종교를 넘어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종교개혁 기념 조형물 맞은편에는 제네바 신학대학 건물이 있다. 이곳은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출발된 학교다. 1558년 학교 건축이 시작되고 이듬해 6월 아카데미가 개교했다.

1564년 ‘기독교강요'의 개정판 작업과 아카데미 개원을 마친 칼뱅은 침상에 눕게 된다. 그는 시의 지도자들 앞에서 ‘부족한 점이 있지만 하나님께 봉사하며 도시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면서 ‘공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추구할 것'을 당부했다. 말을 마친 그는 5월 어느 날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가 묻힌 쁠랭빨래 묘지에서 ‘J.C'라는 글귀가 새겨진 작은 돌을 쓰다듬는다. 육신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정신은 유럽, 아메리카를 넘어 한국으로도 전해졌다. 하지만 오늘 한국교회의 칼뱅을 다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칼뱅의 후예들은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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