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추석연휴 기간 10일간의 일정으로 당회원들 가족들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매 시간 시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이번 답사는 의미가 색달랐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의 이른 비가 시작을 알리는 비를 맞아본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른 비는 지금부터입니다. 그 이른 비의 첫 비를 맞아보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저희 답사 기간이 이스라엘의 초막절과 겹쳐져 이스라엘의 절기행사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그들이 광야에서 고생하던 때를 기념하며 초막을 짓고 초막절 행사를 하는 것을 보며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참 모질게 생존해 왔던 민족입니다. 많은 연단이 있었고 고난을 겪은 민족입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스라엘의 찬양은 아무리 신이 나는 곡조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왠지 그 안에는 구슬픔과 애절함이 풍겨져 나옵니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야를 애타게 기다립니다.

문득 출애굽기 19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도착하였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출애굽기 19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애굽을 출발하여 숙곳(12:37), 에담(13:20)과 엘림(15:27)을 거쳐 신광야와 르비딤을 지나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출애굽기 19장 2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쳤’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거기’란 ‘시내 광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만 전체 문맥으로 볼 때 그 뒤에 언급하는 ‘산’을 강조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어 성경에는 단순히 ‘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에 ‘하’가 첨가되어 ‘하 하르’(출 19:3) ‘그 산’, 즉 시내산을 일컫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뉴앙스는 그들이 고생 고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바라던 ‘그 산’ 즉 ‘시내산’ 앞에 드디어 장막을 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는 시내산 앞에 도착한 것에 대한 감사와 감동과 감격이 묻어져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출 3:8)과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출 3:10)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바로 이 시내산에서 예배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출 3:12)

비록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산으로 오기까지 그들은 숱한 고난을 겪었지만 드디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그 산’ 바로 코 앞까지 다다랐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대개 사업에 성공하고 자녀가 출세하여 건강하면 감동하고 감격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잃어버림에 대해서는 그리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내 안에도 은근히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발견하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어느 정도 외적인 형태를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고 예수님이 당연히 계신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더 이상 예수님 잃은 목회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라진 교회를 더 이상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다윗의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하는 고백을 되뇌고 싶은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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