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우리 주님이요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마 4:17)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원했던 것은 믿는 자들의 전체 삶은 참회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94.신자들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형벌, 죽음, 지옥을 통해서라도 따라가려는 그들을 우리는 격려하고, 95.잘못된 영적 안정을 통해서 자신을 위안하기 보다는 많은 고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에 더 의지하는 자들을 격려해야 한다.”

▨… 주후 1517년 10월 31일, 앞의 3논제를 포함한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채교회의 출입문에 붙임으로써 루터의 개혁운동은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겨졌다. 95개조의 논제는 대부분 면죄부 판매와 신앙생활에 대한 교황권의 전횡을 고발한 내용이었기에 당시의 교권세력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루터의 개혁운동이 확산되어가는 추세를 보이자 교황은 1520년 6월에 정죄교서를 발표하였다. 루터는 이 교서를 사람들 앞에서 불살라버렸다.

▨… 루터의 개혁운동은 당시 교회의 절대권력이었던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신학논쟁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과 삶 전체를 거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 투쟁의 편린을 우리는 “반율법주의자들에 반대하여”라는 루터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나 자신만도 악마의 공격을 받은 것이 스무 번도 더 됩니다. 그 첫 번째 것은 교황제도였습니다.” 때로는 은신해야 했지만 루터는 강의와 글을 통해서 목숨을 건 개혁의 깃발을 꾸준히 들었다.

▨… 비텐베르크교회에 95개의 논제를 붙였을 때 루터는 이미 비텐베르크대학의 교수로서 교회의 중상층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권력층의 일원으로서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혹독한 가난의 유년기를 보냈던 루터는 경제적으로 보장된 미래를 걷어차 버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복음이라는 보화는 부유한 재산에서부터 그 소유자를 구해내는 그물이었다”는 확신(제65조)이 없었다면….

▨… 어떤 사람이 말했다. “혁신을 장려하는 확실한 방법은 많지 않지만 이것을 없앨 분명한 방법이 하나 있다. 통념을 공격하는 일을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조현욱, ‘호모사피엔스와 과학적 사고의 역사’) 이 위험을 루터는 감당했다. 오늘의 성결교회도 혁신을 논하려면 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우리교단이 ‘성결교회개혁 95개 조항’을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24일 현재) 그 95개 조항이 성결교회의 통념을 공격하는 것인가를 묻는다면 너무 가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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