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연 교수
종교개혁은 여러 회의와 문서들과 신앙고백들을 통하여 나타났지만, 사실 일반 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에 초점은 바로 예배와 신학이었다. 개혁자들이 보기에 중세 서방교회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았다.

미사는 많은 상징과 의식들 그리고 요란한 볼거리로 채워져 있었으며 회중은 그저 앉아서 바라보는 구경꾼으로 전락되었다. 성찬이 매주 미사 때마다 행해졌고 성찬의 떡이 축성되고 높이 들어올려져 경배되었지만 빵과 포도주는 고작 1년에 한두 번 회중들에게 주어질 뿐이었다.

미사 중에 사제가 행하는 비밀기도는 회중에게 들리지 않았으며, 미사의 공식언어가 라틴어이다보니 대부분의 회중은 미사 자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성찬에서 예수의 갈보리 희생을 강조하다보니 매번 미사가 행해질 때마다 예수께서 또다시 반복해서 희생되신다는 잘못된 가르침은 미사가 갈보리에서 예수께서 바치신 자기봉헌에 첨가되는 또 다른 희생제사로 인식되게 하였다.

특히 중세 가톨릭교회는 성례전에서 하나님의 은총이 ‘의식을 통해’ 회중에게 전달된다는 사효론(事效論, ex opere operato)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기계적인 은총론을 초래하였다. 다시 말해서 미사에 2번 참여하면, 1번 참여하는 것보다 2배의 은총을 받는다는 식이다.

그래서 평신도들은 사제에게 돈을 주고 자신을 위해 미사를 드려달라고 부탁하게 되었고, 사제가 그들을 위해 사적인 미사(private mass)를 드려주는 일도 많았다.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 있는 영혼이 천국으로 이동한다는 논리도 안 될 것이 없었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과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의 깃발을 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단지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를 받아먹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의 몸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받아먹을 때에 비로소 그에게 갈보리의 은총이 전달된다는 것이 루터의 주장이었다. 성례전의 행위 자체가 아니라 성례전 참가자의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것을 ‘인효론’(人效論, ex opere operantis)이라고 부른다.

개혁자들이 성취한 것은 많다.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가 아니라 각 나라별로 자국어로 예배하도록 한 것, 설교의 회복을 가져온 것, 사제만이 아니라 회중도 예배에서 찬송하도록 회중찬송을 도입한 것 등은 실로 위대한 그들의 업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회중으로 하여금 예배의 수동적 참여자가 아니라 능동적 참여자가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와 칼뱅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매주 ‘말씀과 성찬’의 균형이나 초대교회 예배의 회복 등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완의 과제이다. 예배개혁에 관해 신자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려는 열정이 과한 나머지 예배를 지나치게 교훈적(didactic)인 것으로 만든 것도 그들의 한계였다. 그로 인해 창조와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감사와 찬양의 천국잔치가 되어야할 예배가 신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자리로 변질된 것이다. 오늘 우리의 예배에 천국의 풍성함과 구원의 신비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광휘가 부족하고 오히려 지루하게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자.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고고학적 발굴과 성서신학적 연구를 토대로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되면서 서구의 여러 예배전통들이 예배를 회복하고 갱신하는 운동을 펼친 것은 진정 개혁자들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실현한 것이라 평가된다. 차제에 우리 성결교회도 2천년 예배역사에 대한 안목을 가지고 세계교회들의 예배회복과 갱신운동에 동참함으로써 개혁자들의 정신을 성취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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