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비추면 어둠은 사라진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걸으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새벽 시간이었다.

한국에서도 날마다 새벽에 기도한다. 내가 신학교를 간다고 했을 때 목사 사모였던 모친은 아들이 새벽에 일어나 기도회를 인도하여야 할 것을 가장 걱정할 정도로 아침 잠이 많은 나인데, 1년에 몇 번의 실수를 제외하면 거의 매일 새벽 기도를 하였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30일은 30여 년 목회의 어떤 특별새벽기도회보다 은혜로운 시간의 연속이었다.

날이 밝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해가 떠올라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순간까지는 온전히 주님과 나만의 시간이었다. 다른 사물들이 잘 보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어두움이 주는 유익일 것이다. 헤드 랜턴으로 겨우 내 앞만 비추며 시골길을 걸으면서 주님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언젠가 한국의 순례길을 걸어보려고 한다. 선교사들이 들어온 통로였던 인천에서 순교지들을 연결하여 신안군 증도까지 걸어보려고 한다.

그런데 과연 까미노 데 산티아고 같은 감동이 있을까? 단순히 길을 걸어서가 아니라, 그 길의 중요성과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그 길을 걷는 순례자가 얼마나 주님께 집중할 수 있게 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우리나라 길들은 너무 밝다.

아무리 캄캄한 밤에 걷는다 해도 이미 길에는 불이 밝혀져 있고, 많은 차들이 운행하기 일쑤다. 시골길을 안전하게 주님만 생각하면서 걷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혼자 걸은 것이 은혜였다. 주님, 그리고 주님의 능력과 신성을 담고 있는 자연에 완전하게 초점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아닌 순례자로 그 길 위에 서고 싶다면 혼자 걷기를 강권한다.

주님을 향한 찬송과 기도, 그리고 복음의 열정으로 그 길 위에 섰던 사도들을 떠올리며 묵상하는 시간은 정말 값진 시간이다. 일행이 있을 경우 새벽에 시차를 두고 출발하여 해가 떠오른 오전 시각에 만나 함께 걷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낮의 햇살이 너무 뜨거워 새벽부터 걷기 시작하여 오후에 쉰다. 새벽에 출발한 대부분 순례자들은 헤드랜턴을 사용한다. 양손은 폴을 짚기도 하고, 사진을 찍는 등 다른 활동을 위함이다.

18일째 저녁을 폰세보돈이라는 곳의 알베르게에 묵었다. 라바날 델 까미노에서 묵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나는 한 마을을 더 갔는데 다음 날 새벽에 까미노 데 산티아고 프랑스길에서 가장 높은 1,500m의 산에 있는 철 십자가(La Cruz de Ferro)를 보고, 그곳에서 일출을 만나기 위해 산 중턱의 마을까지 힘들게 올라갔다.

다음 날 새벽 알베르게를 나서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부른다. 젊은 아가씨가 다가와 무언가 내게 말을 거는데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 아가씨는 영어는 한 마디를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못한다. 무언가 장황하게 열심히 설명하는데 나는 알아듣지 못해 한참을 실랑이한다. 마침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가 통역으로 나섰다. 아주머니는 만국 통용어인 몸짓으로 그 아가씨의 말을 전한다. 무서워서 같이 동행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못할 것 없어 함께 간다. 약 1시간의 거리를 우리 두 사람은 ‘묵언보행’을 한다. 철십자가에 이르러 다른 스페인인들을 만난 아가씨는 내게 작별의 손을 흔들며 ‘그라시아스’라고 했다. 내가 그녀와 소통했던 유일한 언어다.

아가씨와 함께 걸으면서 각각 헤드 랜턴으로 길을 비춘다. 얼마 후 나는 슬그머니 내 헤드 랜턴을 가방 안에 넣었다. 내 것은 7년 전쯤 구입한 것으로 당시에는 최신형인 LED였다. 내가 동행해 준 것이 고마웠던지 아가씨는 자주 내 앞쪽을 비춰준다. 그녀의 것과 내 것이 같은 곳을 비추는 순간 내 헤드 랜턴은 무용지물이 된다.

새벽에 출발해서 걷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는 내게 빛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어두움과 빛을 생각하게 하는 길이다. 해가 떠오르면서 변화되는 모습은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묵상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매일 새벽은 조용히 열린다. 어느 하루도 칠흑 같은 어둠을 향해 이제는 물러가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 해가 떠오르면 어둠은 저절로 물러간다.

종종 찬송과 기도로 아침을 맞이하다 보면 이미 세상이 밝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헤드 랜턴을 끄는 일을 잊는다. 해 앞에 랜턴은 의미를 상실한다. 물론 어두운 새벽길을 걸을 때 헤드 랜턴이 필요했다. 방향을 찾고,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랜턴을 비춰야 했다.

세상의 지식이, 경험이 인생의 길을 비춰주는 훌륭한 도구임이 분명하다. 하나님도 인생들에게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을 주시지 않았는가! 하지만 참 빛이 필요하다. 인생을 헤드 랜턴만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다. 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해가 비춰지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진다. 해가 비춰지면 랜턴은 의미를 상실한다.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며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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