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살길 찾아 교회에 입교

1907년 친일파 이완용과 일부 대신들의 강요에 따라 고종황제가 하야하고 태자 융희가 순종황제가 되었다. 이는 일본의 조종에 의한 것이었고 이 사실에 절망한 조선 백성들은 분노했다. 누구보다 애국심이 강한 원세성은 ‘조선에, 조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잘못이다’라는 비탄과 함께 바깥출입을 일절 삼가고 독서로 마음을 다스리며 침울하게 지냈다.

어느 날 외출하고 돌아온 아내를 통해 그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은 “조선민족이 사는 길은 교회의 부흥에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교회 근처를 지나다가 젊은이들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고 하는 아내의 말에 그의 귀가 솔깃했다. 점점 망해가는 조선에 살길이 있다니…. 원세성은 자나 깨나 조국의 운명을 염려하고 있던 차 들은 소식이기에 가슴이 뛰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그 소식의 근원지인 연동장로교회로 갔다. 마침 연동교회는 부흥집회 중이었다. 교인들이 교회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집회를 초청하면서 “교회만이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그는 아내와 함께 집회에 참석해 보기로 했다. 넓은 예배당 안에 청장년들 수백 명으로 가득 찼고 노래 소리에 어떤 힘이 넘치고 있었다.

설교의 내용을 들은 그는 곧 깨달음이 왔다. 국가나 개인이나 모두 만세 전부터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을 모르고 현세만 보며 사는 자는 불의가 판치는 죄가 많은 세상을 극복할 수 없으나 하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사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불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전진하는 삶을 살수 있다고 했다. 이 날 원세성은 난생 처음으로 들어본 말이었지만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마음으로 “그래. 진리가 있어. 더 깊이 알아 볼 필요가 있다”고 확신한 후, 집에 돌아와 아내와 의견을 나누고, 교회에 다니며 예수를 믿어보자고 결단했다. 그래서 부부는 1907년 6월 어느 주일에 연동장로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하고 믿겠다고 손을 높이 들었다. 두 부부는 신자들의 뜨거운 환영과 박수를 받았다.

예배가 끝난 후 그의 부부는 담임목사인 게일 선교사의 안내로 교회의 인사들을 차례로 만나 인사했다. 거기서 그는 깜짝 놀랐다. 그가 평소 애국지사로 존경하던 인물들인 이상재, 이원긍, 김정식, 홍재기, 유성준, 안국선 등 독립협회의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도 원세성의 경력을 잘 알고 있어서 서로 반가워했다. 과연 교회는 애국자들의 집합소라는 것을 확인한 그는 좀 더 일찍 교회에 나오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

이때부터 그의 부부는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여 설교를 깊이 청취하고, 틈을 내어 성경을 열심히 정독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교회의 법도를 배우고, 경건생활의 훈련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특히 그의 아내는 양반의 가문에서 익힌 부도(婦道)를 내용으로 교회의 부인회에서 가르치고, 부인회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유학의 기본 학문과 기독교 진리에의 열정적인 탐구로 말미암아 원세성의 신앙과 진리터득은 일취월장했다. 그는 세례문답에 참가하여 자기 죄를 고백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온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그동안 그의 가슴을 억눌렀던 국가의 운명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 평안했으며, 또한 전통과 관습이 몸에 밴 유교의 위엄과 허례의식도 이제 온유하고 겸손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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