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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쁘띠프랑스
개혁 향한 열정, 다양성 속 일치에 헌신
[1102호] 2017년 08월 30일 (수) 16:53:58 조재석 기자 webmaster@kehcnews.co.kr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쿠텐베르크 광장

종교개혁 전야, 노틀담(뮌스터)의 설교자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스트라스부르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고 시의회를 중심으로 민주적으로 도시 운영이 이뤄져 종교개혁 때는 시민의식 고양에 따라 중세교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때 요한 가일러는 웅변적 설교로 도시와 중세교회의 도덕적 갱신을 촉구하는 설교로 시민들의 의식을 깨우며 종교개혁의 서막을 열었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스트라스부르는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고 시의회를 중심으로 민주적으로 도시 운영이 이뤄져 종교개혁 때는 시민의식 고양에 따라 중세교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때 요한 가일러는 웅변적 설교로 도시와 중세교회의 도덕적 갱신을 촉구하는 설교로 시민들의 의식을 깨우며 종교개혁의 서막을 열었다.

   
   마르틴 부처가 사역한 토마스교회
1478년부터 1510년까지 가일러가 설교자로 활동했던 ‘노틀담’(Notre Dame, 대성당)을 찾았다. 웅장한 교회 전면부와 내부의 옛 시계를 뒤로한 채 가장 먼저 가일러가 설교한 설교단 앞에 섰다. 그곳에서 가일러는 복음서에 담긴 그리스도의 말씀을 토대로 시민들에게 도덕적 죄악을 회개하도록 권고했던 것이다.

하지만 스트라스부르에서 종교개혁의 첫 걸음을 내딛은 인물은 마태우스 젤이다. 비텐베르크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1518년 대성당의 설교자가 된 젤은 가일러처럼 도덕적 설교로 도시를 일깨웠다고 한다. 교회 지도부가 그를 탄압하자 시민들은 젤을 위한 이동식 나무 설교단을 만들어 젤이 설교하길 원할 때마다 대성당에 나무 설교단을 놓았다고 한다.

가일러와 젤이 도덕적인, 종교개혁적인 설교를 한 대성당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웅변적인 가일러의 목소리, 중후한 젤의 목소리가 대성당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것 같다. 젤은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그로 인해 도시에 종교개혁자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젤과 함께 피른과 알트비서가 종교개혁의 편에 섰고, 1523년 볼프강 카피도와 카스퍼 헤디오, 마르틴 부처 등이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하게 된다. 더욱이 젤은 나중에 도시를 대표하는 종교개혁자인 부처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설교단에 대신 세우기도 했고, 자신의 집에서 진행하는 라틴어 성서연구반에서 가르치도록 했다.

교회 내부를 둘러본 후 대성당 정문에 섰다. 파리의 노틀담이나 리용의 대성당에 견줄 수 있는 교회 전면부는 종교개혁과 관련해 재밌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바로 이곳이 스트라스부르 종교개혁자들의 결혼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이 문 앞에서 젤은 몇몇 동료들이 참석한 가운데 카타리나라는 시민의 딸과 결혼서약을 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이 잇따라 결혼하면서 그의 결혼은 금세 화제에서 벗어났다. 젤에 앞서서는 부처와 피른이, 젤 다음에는 이듬해 1월에 4명의 종교개혁자들이 결혼했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결혼은 가르침과 행함이 동시에 이뤄지는 종교개혁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였다.

구텐베르크와 스트라스부르의 인쇄술
대성당을 나서 도시 종교개혁의 첨병 역할을 한 인물을 기념하는 구텐베르크 광장에 섰다. 스트라스부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인쇄술이 발달된 도시 중 하나로, 구텐베르크가 이 도시에서 인쇄술을 배웠다고 한다. 그의 인쇄술 덕분에 인문주의자와 종교개혁자들의 저서가 신속히 유럽 전역에 퍼질 수 있었다.

   
                 스트라스부르 노틀담
구텐베르크는 윤전기를 뒤로한 채 서서 인쇄된 종이를 펼쳐들고 있었다. 기둥 사면에는  윤전기를 중앙에 두고 여러 명의 인물이 부조되어 있는데 종교개혁시기와 프랑스 혁명, 미국독립 등의 역사 속 인물들이었다. 바로 개혁, 자유, 정의, 독립, 평화 등의 인류가 지향하는 이상이 글에 담겨 인쇄되고, 확산되었음을 표현하는 듯하다. 그 출발점이 이 도시라는 자긍심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곳에 앉아 도시의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유명한 인문주의자 세바스티안 프랑크가 종교개혁 시기에 도시 검열관으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상대방을 비방, 중상모략하는 출판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유롭게 출간할 수 있도록 했고, 루터의 저술도 제재 없이 신속히 출간됐다고 한다. 시의회 또한 그런 입장을 적극 지지했다. 인쇄술, 그리고 자신의 사상을 자유롭게 말하고 펼칠 수 있도록 허용한 학자와 시의회의 모습은 진정한 자유와 정의가 어디로부터 확산되는지 생각하게 된다.

마르틴 부처와 토마스교회
그러나 누가 뭐라해도 스트라스부르의 대표적 종교개혁자는 마르틴 부처다. 알자스 지방 슐레트슈타트에서 태어난 부처는 현대적 경건운동이 운영하는 라틴어학교를 다녔고, 15세에 도미니칸 수도원에 들어갔다. 인문주의 영향을 받은 그는 하이델베르크 수도원에 있을 때 루터를 만났고, 그의 종교개혁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그의 첫 목회지인 아우렐리아교회에는 부처를 기념하는 작은 동판이 있으며 토마스교회에는 루터를 닮은 듯한 부처기념비가 전부였다. 오히려 1130년대 주교 아델로그와 강단의 마르쉘 헤르만 모리츠의 1776년 석관장식 눈길을 사로잡았다. 설교단 또한 부처 당시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아쉬움은 더욱 컸다. 하지만 교회 옆의 건물에서 1544년 카스퍼 헤디오에 의해 학생들의 신학공부를 위해 설립했다는 '콜로키움 빌헬미타눔'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던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 직후부터 신학교육을 위한 작은 학교를 설립했고, 부처는 1538년 요한네스 슈투름을 초청해 도시학교로서 김나지움을 설립했다고 한다. 기록을 볼 때 헤디오가 목회할 때 좀 더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위한 학교로 신학교를 정식 설립한 듯하다.

또한 ‘슈투름이 지식과 인문주의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이 학교는 1556년 아카데미로 되고 1621년 대학이 되었다’는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의 기록을 볼 때 이곳이 바로 그 대학의 뿌리임을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옛 신학교육의 장소는 현재 대학 신학부 건물과 알자스와 로트링겐 지방 개신교 본부 등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과거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었다.

교회와 신학교육의 장소를 나서 부처가 살았다는 집 앞에 섰다. 골목 안쪽에 있는 집은 지금은 일반인이 사는 집인 듯 특별한 표시는 없었다. 그곳 어딘가에서 부처는 글을 쓰고 종교개혁 진영의 하나 됨과 스트라스부르, 나아가 유럽 전체의 종교적 개혁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다. 작은 마당 쪽 출입문을 부여잡고 잠시 눈을 감았다. 하나님, 부처처럼 개신교의 갱신과 개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망명자 칼뱅 목회지·종교개혁 배움터
   
                                                                                     쁘띠프랑스

부끌리에 교회와 쁘띠 프랑스를 찾아
칼뱅은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며 종교개혁 사상을 체계화하게 된다. 부처의 초청으로 온 이 도시에서 칼뱅은 결혼도 했고 신학교수로 사역했으며, 부처와 함께 개신교와 가톨릭 진영의 대화에도 참석했다. 그는 이 시기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칼뱅은 1538년부터 1541년까지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며 종교개혁 사상을 체계화하게 된다. 부처의 초청으로 온 이 도시에서 칼뱅은 결혼도 했고 신학교수로 사역했으며, 부처와 함께 개신교와 가톨릭 진영의 대화에도 참석했다. 그는 이 시기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종교개혁 당시 독일 땅인 스트라스부르는 국경지대 도시로 프랑스 왕정에 의해 탄압 받은 개신교인들이 많이 망명한 곳이다. 이들 망명자 중 방앗간, 피혁제조공들이 도시 운하 주변에 머물렀고 이곳에 ‘쁘띠(작은) 프랑스’라고 불리는 곳을 형성하게 된다. 아마도 칼뱅은 이들의 종교개혁적 열정, 망명에서 오는 외로움을 같은 망명자로서 위로하며 격려하며 목회했을 것이다.

1538년 칼뱅은 프랑스 망명자를 위해 부끌리에교회를 세웠다. 그가 목회했던 교회는 새교회(Le Temple Neuf)로, 현재의 부끌리에교회는 후대에 다시 설립된 것이라고 한다. 어떻든 칼뱅은 이 교회에서 목회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기독교강요 개정판, 로마서 주석 등 종교개혁의 이론을 다듬어 간다.

교회 정문에는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최초 목사를 기념함. 장 칼뱅(1538-1541), 삐에르 브륄리(1541-1544)'라는 돌판이 새겨져 있었다. 비록 슈말칼텐 전쟁에서 개신교가 패전하고 도시는 재가톨릭화의 폭풍이 몰아쳐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도시를 떠났지만 칼뱅의 후예들은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대성당 박물관
교회 내부에 들어섰을 때 성화나 성상, 교회 장식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유일한 장식이 있다면 작은 십자가와 성서로 장식된 강단 앞 설교단과 프랑스어 성서가 펼쳐진 강대상이 전부였다.

칼뱅이 스트라스부르에 왔을 때 한동안 부처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쉼을 얻고 종교개혁 열정으로 다시 무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부끌리에교회와 망명자들이 있는 곳에 새 집을 얻어 자신의 이상을 현실화시켜 나갔으며, 3년 후 제네바로 복귀해서는 도시 전체를 역동적으로 변화시켜 나간다. 비록 3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목회와 연구, 저술과 부처 등 개혁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원숙한 신학자로 성장했다는 점에서 스트라스부르는 그의 종교개혁 배움터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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