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praυ′thV)는 ‘명문가에서 태어나다’, ‘가문이 좋다’는 뜻이 있습니다. KJV, NIV는 ‘gentleness’로 번역해서 ‘①기질, 본성이 점잖고 부드럽다’, ‘②행동, 몸가짐이 예의 바르고 질서가 있다’라고 이해를 돕습니다.
술주정이나 도박, 쌍욕 등 폭력적인 언동은 가정의 내력과 무관치 않습니다. 학습된 것이어서 목회자나 평신도 구분 없이 때마다 일마다 심통을 부리고 교회, 가정, 교단, 사회와 국가에 분란을 일으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1:1)에서 ‘이 세계’는 본문인 그리스어 ‘bι′bloV genε′sewV’ 인데 이는 성경적인 가계(계보)를 뜻합니다.  KJV, NIV도 ‘世界’(지경계, the world)가 아니라 이을 ‘계’를 써서 ‘世系’(the genealogy)로 씁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신분의 변화가 있는 신앙의 명문가에 편입되었으니 그 본성과 행위에 부드러움과 예의와 질서가 있지 않을까요?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약 1:18),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여기서 ‘나다’는 본문에 ‘gennα′w’인데 모두 ‘위로부터 나다’, ‘처음과 같이 다시 태어나다’로 KJV, NIV도 ‘born again’입니다. 이제는 겉사람의 본성과 옛사람의 행위는 자연히 변화되는데 이 변화는 외관과 모양이 바뀌는 ‘change’가 아니라 기질과 속성, 근본이 변화되는 ‘transformation’입니다.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롬 11:24)
Ernest K. Kirk는 ‘The Epistle to the Romans’(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성품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라고 고백합니다. A. Augustine는‘The confessions’(고백록)에서 “회심한 그리스도인은 생각, 사상 그리고 생활의 변화를 경험한다”라고 했습니다.

2005년 WEC선교회 한국본부 이사들이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선교훈련을 받던 때 필자는 ACTS 전 총장 림택권 목사님과 한 방을 사용하며 친목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기 림 목사님은 제게 “성품이 온유치 못하면 수박, 사과, 토마토처럼 겉과 속이 달라서 성품이 혼란하니 목회현장에서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시 37:11)를 통해서 온유한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에서 누리는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John Parry는 ‘The Pastoral Epistles’(목회서신)에서 목회현장에서 온유한 사람이 오랫동안 기억될 것임을 교훈합니다.

이러한 본성의 변화와 행동의 올바른 예의와 질서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될까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온유해야 가정도, 목회도, 우리 사회도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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