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첫 목회지, 그리고 시련

이만신은 졸업반이 되자, 여자동기생의 중매로 부평제일교회 이정말 처녀와 만나 4개월 만인 1955년 11월에 결혼했다. 이정말 사모는 전북 완주 출신으로 향학열과 생활력과 신앙심이 강해 고학으로 보육학교, 간호학교, 양재학교를 졸업해 자격증을 3개나 지닌 당찬 규수였다.

그는 12월에 전남 신안군 압해중앙교회 담임 전도사로 부임했다. 섬마을 치고 주일마다 170명이나 모이는 큰 교회였던 그의 첫 목회지는 은혜롭고 행복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에 그에게 군목 입대영장이 나왔다. 그는 할 수 없이 교회를 사임하고, 아내를 친정인 부평으로 가게 한 후, 광주 보병학교로 입대했다. 하지만 그는 1차 신체검사에서 ‘건성 늑막염’을 진단받아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는 할 수 없이 부평으로 가서 단칸방을 살림을 시작했다. 아내가 갓난아이를 돌보며 삯바느질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부평신촌 개척교회와 40일 금식기도
이 전도사는 1956년 10월에 개척한지 4개월 만에 개척자가 떠난 천막교회 부평신촌교회에 부임한다. 처음엔 신자가 10명에 불과했지만 그가 아픈 몸을 이끌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여 1년 만에 40여 명이 됐다. 그러자 그는 교회건축을 결심한다.

장남인 그는 고향의 전답과 염전을 모두 팔아 그 돈으로 건축용지 200평을 매입하고 그 땅에 28평의 목조교회당을 외상으로 건축했다. 그런데 외상을 갚지 못해 건축자에게 많은 수모를 겪다가 보름간 금식기도를 통해 외상값이 기적적으로 해결되는 체험을 했다.

교회가 차츰 부흥하던 중 그는 1959년 제14회 교단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목사는 더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 숭실대 철학과에 학사편입을 했다. 철학을 공부하니 지적인 설교 준비하는데 도움은 됐으나 교회부흥은 별로였다. 주일예배 120명을 벗어나지 못해 고민했다. 

어느 날 서울대 사대 재학중 입대해 학보병으로 복무하는 동생이 휴가차 왔는데 식구들에게 불만을 터트리고 시끄럽게 했다. 그가 야단을 쳤더니 온순하던 동생이 형에게 대들었다. 그는 혈기를 못 참고 현관 유리창을 주먹으로 박살내어 난리가 났다.

그는 곧 후회하면서 자책했다. 더 이상 설교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 죽으면 죽으리라.” 그는 선임장로에게 편지를 써서 ‘교회가 부흥하지 못한 책임을 느껴, 삼각산기도원에서 40일 금식기도하겠으니 그동안 설교를 맡아 달라’고 했다.

그때가 1963년 7월 31일이었다. 이튿날부터 40일 금식기도에 돌입했는데 하루 5번 시간을 정해서 기도하고, 남은 시간엔 성경을 읽고 연구했다. 40일 동안 육체적 고통이 심해 죽을 것 같은 고비가 4번이나 있었으나 기도로 버텼다. 마지막 날 밤, 힘을 내어 기도하던 중 갑자기 그의 머리에서부터 뜨거운 불길이 내려오더니 온 몸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자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용솟음 쳤다. 그는 성령이 임한 것을 체험하며, 갑자기 힘찬 음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2~30명 되던 새벽기도회 인원이 7~80명으로 증가했다. 교회당이 너무 좁아 40평으로, 또 얼마 있다가 또 60평으로 2번이나 증축했다가 1967년 아예 모두 헐어버리고 붉은 벽돌 2층으로 신축했다. 예배인원 300명을 돌파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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