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예서제서 흉흉한 소리들이 쏟아진다. 사장님, 고위직 공무원, 그리고 사성장군과 그의 아내의 갑질 뉴스가 춤을 추듯 우리 사회 전반을 달구고 있다.

근데 생각해보면 이런 일이 어제 오늘의 것도 아닐 텐데, 왜 하필 이 즈음에 봇물 터지듯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일까.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우리 사회가 평등해지고 개방되고 있으며, 또한 각자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즉 더 이상 갑질을 참지 않겠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행복을 추구하는 헌법적 실존으로서의 자존감을 확보하겠다는 생각이 커가고 있는 것이기에 썩 불편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겠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우리 사회는 보다 투명해지고, 더욱 서로 신뢰하게 되고, 또한 사람을 존중해주는 공동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갑질은 교회 밖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회와 그와 관련된 조직 안에도 이런 저런 모양의 갑질이 서슬 퍼렇게 작동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런 갑질이 왜 기승을 부리는가?

사실 갑질에는 이제 그만 멈춰내야만 하는 불편한 생각이 똬리를 틀고 있다. 그건 인간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다. ‘나는 너보다 우월해’, ‘내 지위는 너를 충분히 맘대로 부릴 수 있어’라는 모자란 인간 이해가 그 안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신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만 사용하려 든다. 우리 사회의 못난 갑질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교회 역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

올해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 된다. 사실 루터야말로 신앙의 갑질은 있을 수 없다고 주창한 최후의 중세인이기도 하다. 계급사회였던 중세는 모든 것을 신분에 따라 차등하였다. 귀족은 평민과 농노의 봉사를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으며, 사제는 평신도 위에 군림하며 신과의 만남을 제도적으로 조정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집단적이고 계급적 신분제가 사회 구석구석, 심지어 종교생활에까지 힘을 뻗치고 있을 때 독일의 보잘 것 없던 수도사 루터는 하나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며 ‘만인사제론’을 소리높여 외쳤다.

루터는 하나님을 만나는데 그 어떤 도움도 필요 없다고 보았다. 그분의 은총만으로 충분했다. 거기엔 가톨릭교회란 조직도, 사제란 직제도 필요치 않았다. 신앙이란 오로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신비한 체험이지 조직과 직제가 강압하여 확인시켜주는 객관적 현상은 아니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러니 성령의 세례만 받았다면 모두가 사제이며, 성직자가 된다! 오직 은총, 오직 성서, 오직 믿음만으로 우리는 확실히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개신교회는 이러한 루터의 고백에 기초해 세워졌다. 그러니 개혁교회의 정신을 따르는 우리 모두는 사제와 동시에 평신도가 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교회 내 갑질은 있을 수 없다. 혹여 우리 안에 갑질이 존재한다면 그건 개혁과는 무관한 사탄의 장난일 뿐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내 곁의 사람을 형제로 자매로 품은 이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지 누구는 높고, 누구는 낮을 수 없다. 그러니 교회에서 갑질은 있을 수 없고, 아니 되레 우리는 사회의 갑질을 훈계하고 계도해야 할 마땅한 책임이 있는 새로운 형제 공동체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는 형제요 자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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