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보다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좋아도 좋다는 표현을 잘 안 하고, 싫어도 싫다는 표현을 잘 안 한다. 좋은 일이 있어도 크게 내색하지 않고,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대부분 그냥 꾹 참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다가 한번 뚜껑이(?) 열리면 큰일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표한 ‘한국인의 갈등 해소 방식’이라는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인의 갈등은 ‘감정적 갈등’이 많단다. 상대방과 생각이 다를 때 나타나는 ‘인지적인 갈등’이 아니라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감정적인 갈등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좋으면 그냥 좋고, 싫으면 그냥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기분이 그런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절제’라고 생각한다. 지금 한국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경제가 회복되는 것도 아니고, 남북통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더불어 잘 사는 나라가 되려면 절제가 필요하다. 한국사회는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와도 같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브레이크가 파열되면 사람을 죽이는 흉기가 되고 만다. 한국 사회는 마치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절제 없이 행동하다보면 언젠가는 함께 공멸하고 말 것이다.

지난 7월 20일 오후에 경기도 화성의 한 아파트에서 A씨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리고 지하주차장에서 A씨의 부인인 B씨의 차 조수석에서 C씨가 숨진 채로 발견됐다. A씨가 죽기 전에 경찰에 전화해서 “부인인 B와 부인의 내연남인 C를 죽였다, 나도 죽겠다”고 말을 해서 경찰이 출동했는데 이미 다 죽은 후였다. 정말 B씨와 C씨가 내연관계였다면 정말 잘못한 거다.

그렇다고 둘 다 죽이고, 자기도 죽는다? 그들이 모두 다 절제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B씨와 C씨는 그런 불륜관계를 맺지 않도록 절제하고, 그 사실을 안 A씨도 좀 절제해서 이성적으로 문제를 풀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요즘 욱하는 성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인터넷이 잘 안된다고 수리하러 온 기사를 죽인 사람도 있고, 자기 아파트 창을 수리하는 사람들이 음악을 틀어놓고 시끄럽게 한다고 성질나서 줄을 끊어 추락사하게 한 사람도 있었다. 욱하는 화를 절제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다를까? 그리스도인들은 다를까? 아니면 목회자라도 다를까? 이 질문들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왜 그럴까? 왜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까? 물론 교회 안에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런데 왜 문제가 확대재생산이 될까? 바로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목회자들도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성도들도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되는 것이다.

한국사회가 공멸하지 않고 공생하는 길이 절제인 것처럼 한국교회가 사는 길도 절제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한국사회가 한국교회를 보고 절제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와 목회자, 성도들이 한국사회에 절제의 모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마치 무절제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가 대형교회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형교회가 한국교회 부흥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반대로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만든 데에도 역시 큰 역할을 했다. 언제부턴가 세상의 성공지향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 절제 없이 예배당을 크게 짓고, 절제 없이 큰 차를 타는 경향이 있다. 필자도 역시 그런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일에 절제하라고 가르치고 있다.(고전 9:25) 나쁜 일은 절제하고, 좋은 일은 절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육체의 정욕을 절제하고, 물욕을 절제하고, 분노를 절제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와 목회자들이 더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 그러니 목회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올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가 해야 할 작지만 가장 중요한 개혁은 바로 절제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풍요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절제가 아름답다. 지나친 풍요는 오히려 추하게 만든다. 절제가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을 아름답게 만든다. 절제는 십자가의 길이요, 개혁의 길이다. 절제는 힘든 일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이고,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에 개혁의 길이다. 절제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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