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근 교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그 발상지인 비텐베르크를 비롯하여 독일 여러 도시들을 방문한 사람들 가운데 아마도 한국인들이 가장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개혁 정신을 되새기고 쇠락해 가는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한자락 마음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과 연관된 도시들을 방문하는 것은 한국교회의 내면의 문제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교회의 역사는 끊임없이 개혁과 갱신을 추구한 역사이다. 개혁된 교회는 다시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장처럼, 교회는 늘 비본질을 추구하고 비성경적인 가치관에 함몰되어 개혁을 외치곤 했다. 교회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예배와 공동체, 그리고 예수 따름의 삶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예배를 회복한다고 말하며 소그룹을 통해 공동체를 재발견하려고 무던히 애쓰고 제자도는 ‘고상한 이상’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500년 전의 종교개혁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초대교회의 예배와 공동체와 예수 따름을 이제 몸으로 구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작은 가정공동체의 식탁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따르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예배와 친교 공동체는 내적으로 집중된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예배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성과 세상을 향한 경륜(economy)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박해 가운데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외부인들을 교인으로 허입하기 위해 정교한 교리문답(catechism) 과정을 발전시켰는데, 그 과정은 독특하게 구별된 그리스도인들의 인격과 연관된 것이었다. 교리문답의 과정에서 형성된 신앙 공동체는 당시 어떤 종교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 자체로 교회의 증거를 형성했다.

그러나 기독교 공동체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은 핵심은 교리문답이 아니라 예배였다. 그들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정서적이고 정신적 차원 뿐 아니라 몸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 몸과 연관된 그들의 일상의 예배는 그들의 습관이 되었다. 그들은 예배의 습관을 몸으로 익혔고 이웃들과 만남이 이루어지는 일상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그 예배의 삶을 실천했다. 이것이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교리문답의 핵심이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거룩한 습관은 예배를 통해 형성되어 이웃을 향해 담대하게 복음을 증언하는 선교적 삶으로 나타났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는 바울의 주장은, 예배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공적 실천임을 보여준다. 참된 예배는 몸과 영혼이 분리되지 않는 통합된 실재이다.

영적예배는 몸으로 표현되고 구현되기에 영적인 몸과 연관된 성육신적이고 성례전적 차원을 지닌다. 영적 예배는 일상의 구체적 현실 속에서 몸으로 체현해 내는 개인적이고 공동체의 헌신행위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사라지고 단지 예배를 영혼의 문제로 환원시켜버린 그 근저에는 분리와 해체와 단절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예배에 관한 신학적 탈육신(theological excarnation)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서 하나님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 솟구치며, 그 예배에서 우리의 오감과 오장육부가 영적으로 작동되는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아닌 것들을 숭배하므로 바벨론 유수의 아픈 역사를 체험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소비주의에 사로잡혀 탐욕적으로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열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복음과는 괴리된 번영의 복음과 세속적 가치관이 부여한 탐욕이 만연한 교회의 모습을 보며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학사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서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할 때, 온 백성들이 그 말씀을 듣고 통곡하는 모습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는 느헤미야의 권고를 상기해야 할 것이다.(느 8: 5-10) 개혁은 예배의 갱신이며 예배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 백성의 거룩한 선교적 삶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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