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상도 피아노도 없이 시작
신문지와 담요 깔고 첫 예배
7인의 순수한 마음이 모아져
40년 동안 놀라운 역사 일궈

1976년 9월 청명한 가을날이었다. 당시 조일래 집사는 부모님께 “큰 뜻을 품고 서울로 갑니다”라고 말하고 책과 이불 보따리 하나 들고 부인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상경했다. 그런데 막상 갈 데가 없어 영등포역 앞 여인숙에 이틀을 묵었다. 손에 쥔 돈도 없어 막막했다. 다행히 처제의 도움으로 겨우 단칸방을 얻었고, 서울에서 첫 주일을 맞았다. 집 근처에 교회를 찾아갔는데 대림성결교회였다. 교회당에는 성도 몇 명이 있었지만 예배 인도자는 없었다. 어떨 결에 조 집사가 예배를 인도했다. 예배 후에 담임 전도사를 찾아갔다. 여자 전도사였다. 조 집사는 “내가 목회를 해보겠다”고 제안했다. 여 전도사도 순순히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유일하게 남겨두었던 아내의 금목걸이를 팔았다. 그 돈으로 강단 휘장을 꾸미고, 난로도 샀다. 가진 돈을 모두 써버려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내겐 교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비록 목회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뚜렷한 사명감과 신념은 다음주부터 다른 교회로 옮기려던 성도들의 마음까지 바꿔 개척에 동참케 했다. “단 하루만 늦었어도 오늘 수정교회의 역사는 크게 달랐을 것입니다.” 조 집사는 그렇게 7명의 개척 인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됐다.

그렇게 교회를 시작했지만 처음부터 시련이 닥쳤다. 수요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교회당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전에 사역하던 전도사가 교회당 문을 잠가버린 것이다. 같이 사역하자는 제안을 조 집사가 거절했던 탓이다. 어쩔 수 없이 대림 2동 1031-17호 20평 홀을 보증금 50만 원 월세 3만5,000원에 새로 얻었다. 강대상 살 돈이 없어서 헌 책상을 강대상으로 사용하고, 피아노 대신 풍금을 놓았다. 그렇게 1976년 12월 4일 첫 성전에서 감격적인 예배를 드렸다. 비록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와 담요를 깔고 예배를 드렸지만 성도들 모두가 행복했다. 창립예배는 1977년 1월 16일 드렸다. 성도가 어느새 40명으로 늘어있었다. 이들은 “이 교회가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넘어 세계 각처로 복음을 힘써 전파하는 훌륭한 선교의 기지가 되게 해 달라”고 눈물을 뿌리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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