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칭의와 성령, 십자가 신학과 성서번역
‘죄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만’
‘회개 통한 하나님의 용서 알아야’

종교개혁 500주년과 한국성결교회 110주년을 기념해 총회 임원과 서울신대 글로벌사중복음연구소 이사와 연구진이 참여한 국제학술제가 독일 데사우와 하이델베르크,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국제학술제 발표를 요약했다.

▲ 게스트리히 박사
해석학적 관점으로 본 종교개혁 본질 - 게스트리히 박사
루터는 수도원에서 삶의 성화를 위해 노력했다. 루터가 내린 결론은 자기가 하는 참회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형벌의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자신을 구원하는 그 어떤 진정한 참회도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루터는 몇 년 간의 내적 갈등 후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혜,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찾았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도 ‘칭의’가 진정한 ‘의화’인지 아니면 죄가 지배를 하고 있음에도 그저 의롭다고 판단되는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나뉘었다. 물론 칭의는 인간의 노력에 대한 하나님의 보답이 아니며, 대가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지불했다. 루터의 신학에서 믿음과 세례, 칭의와 성화는 통일을 이룬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이루지 못할 일을 맡기셨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죄의 본질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자만임을 깨닫게 됐다. 모든 죄를 첫째 계명을 어기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루터 입장에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외면한 죄가 용서받은 것이다.

우리 마음에 첫 계명이 바로 세워지면 모든 것을 이기게 된다는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오직 복음의 설교와 오직 은총에 기반을 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성결을 되찾게 해 주는 것이다.

그동안 (중세교회)의 가르침은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에 의해 내면이 변화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를 통해 인간은 좋은 업적을 이룰 수 있고 점점 자기를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다르게 봤다. 루터는 인간과 양심에 관한 개념을 새로 정의한다.

하나님의 부름과 믿음의 응답에 의해서다. 듣고 대답하는 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루터가 성화를 간과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하나님께 실존적인 대답을 주어야 한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창조적인, 용서하는 힘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창조의 회복이다.

루터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세상을 나아지게 하는 것은 우리의 힘도 부족하거니와 우리의 과제도 아니다. 루터는 ‘어떻게 하면 내 구원을 위해 좀 더 나아질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포기하라고 한다. 오히려 ‘이루어질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내가 순종해야할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하나님의 행하심에 순종하는가’ 등 초점을 우리 자신에게 맞추게 한다.

▲ 정병식 박사
마르틴 루터와 성령이해 - 정병식 박사
루터는 초대교회의 삼위일체 이해를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성령의 활동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했다. 당시 종교개혁 진영 내부에서 개혁의 정당성을 성령의 직접적 지시나 내적 명령에 두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논의의 유발자는 칼슈타트와 토마스 뮌처였다.

이들은 행동의 근거를 성령의 직접적 역사와 내적 지시에 두며, 개혁의 방향을 주관적으로 선회하려고 했다. 또한 평신도들이 성령의 소유를 촉구하며, 성령의 지시를 받은 자신들만이 참된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루터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깊이 숙고했고 성서를 토대로 반박했다. 루터에게는 내적 깨달음보다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했다. 그는 성령의 역사를 말씀보다 앞세우지 않았다. 선 성서, 후 성령이었다. 루터의 견해는 1520년대 초중반 열광주의자와의 대립 속에서 형성되어 후반에 발간된 ‘고백’, ‘대(소)교리문답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등에 표명되어 있다.

▲ 미하엘 벨커 박사
루터의 십자가 신학 - 미하엘 벨커 박사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자 총회는 1518년 4월 25~26일 열렸으며, 루터는 40개 논제를 발표했다.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의 규율을 지켜서 스스로 의로움에 도달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규율을 남용하는 것이다.

21조에서 루터는 두 가지 개념의 신학을 제시한다.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본질로부터, 즉 자기의 영광, 지혜, 힘과 신성으로부터 알려고 하는 신학인 영광의 신학과 이에 반하는 자신이 주장하는 신학인 십자가 신학이다. 루터는 ‘영광의 신학자는 나쁜 것을 좋다고, 좋은 것을 나쁜 것이라고 부른다'고 혹평한다. 그것은 영광의 신학이 하나님의 계시에서 그리스도를 추상화하며, 그리스도를 모르며, 고통 속에 숨겨진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와 고통 가운데서만 경험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선을 행치 못하는 스스로의 무능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창조의 하나님께 향하는 길이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움이 믿음을 통해 부여될 수 있다고 루터는 말한다. 이 새로운 신학적 출발은 지금도 선구적이다. 계속적으로 막강한 영광의 신학과 싸워야 하고 새로워지고 지켜져야 한다.

십자가 신학은 혁명적 신학이다. 예수의 삶과 그의 부활의 힘을 통해서만 이 혁명의 크기를 파악할 수 있다. 루터는 계획적으로 이 신학을 종교개혁의 중심에 세웠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약함과 고통을 품은 삶을 통해 자신을 보여주었다. 현대를 살고 있는 겸손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사랑, 공의,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세계를 위한 지속적인 책임 안에 머물러야 한다.

▲ 이규영 박사
루터 성경번역과 표준 독일어 - 이규영 박사
독일어는 게르만어로부터 기원한다. 6~7세기에 기독교 문화가 독일어에 영향을 주었고 이후 민족어로서 독립된 지위를 획득했다. 독일어는 벤라트선(독일 중간선)을 경계로 남쪽은 고지(높은지대) 독일어, 북쪽의 저지(낮은지대) 독일어로 양분되었다.

루터는 성경번역을 하면서 다양한 신조어 뿐 아니라 훌륭한 표현방법을 만들었고 투박한 표현을 지양하면서 독일어의 격조를 향상시켰다. 또 남부의 고지독일어와 북부의 저지독일어 중간지대에 있었기에 두 지역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이 경험과 재능을 성경번역에서 활용했다.

또 언어 재능을 바탕으로 대중들에게 쉽게 와 닿는 명료한 표현을 지향했다. 루터는 또 도시에 기독교적 학교를 세우도록 독려해 대중들 스스로 책을 읽도록 초점을 맞췄다. 또 루터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 새로운 신앙관 확립에 기여했다. 그의 성서번역은 나중에 표준독일어가 확립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19세기 들어서는 루터가 쓴 독일어가 독일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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