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국 목사
어머니 유품이라곤 우리 집 거실 창 앞에 놓인 다듬잇돌과 안개 속 물체처럼 희미하게 빛 바랜 사진 한 장이 전부다.

그날이 4월 20일 주일이었다. 무슨 일로 어머니가 새벽기도회에 나오시지 않았는지 걱정되어 방문을 열고 불러도 대답이 없으셨다. 주무시는 것처럼 조용히 떠나셨다. 갑작스런 슬픔이라 영정 사진도 준비하지 못해 사진첩에서 찾아낸 작은 사진을 확대해 사용했던 그 사진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 진다’는 말, 어머니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 어머니가 떠나신지 오래되었건만 여전히 고운 모습으로 선명하게 다가온다. 어머니 살아오신 이야기를 진작 들었어야 하는데 오래 생존하실 줄 알고 한 없이 미뤘던 것이 후회스럽다. 

이 오월에, 단 하루 저녁만이라도 어머니를 모시고 싶다. 좋아하시는 음식으로 저녁을 대접하고 상을 물린 뒤엔 어머니 가슴에 묻어 두셨을 생전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들었으면 좋겠다. 본래 말 수가 적으셔서 좋은 일이고 언짢은 일이고 세세하게 표현하는 분이 아니셨다. 그러니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외로움도 차곡차곡 가슴 속에 묻어두고 사셨음이 틀림없다.  

아버지를 처음 만나셨던 이야기가 듣고 싶다. 누구의 중매였는지, 혼례는 어느 계절에 치르셨는지, 날씨는 좋았는지, 혼수는 무얼 준비하셨는지, 시집가는 길이 멀어 가마 속에서 곤란을 겪지는 않으셨는지 듣고 싶다. 

보통학교를 졸업하신 아버지가 도시로 나가 직장을 얻고 외지를 전전하시던 젊은 시절, 어머니의 기뻤던 일, 슬펐던 일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내가 태어나기 전과 영아기의 이야기들은 신기하고 흥미진진할 것만 같다.

고난의 대명사인 ‘어머니’, 이름만 떠올려도 하늘 아래 자식들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에 이슬이 맺힌다. 출산의 수고에서부터 평생을 지극정성으로 키워주신 사랑 때문이다.  

내 어머니는 서른아홉 살 되던 해, 여름장맛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던 한 밤중에 마흔한 살의 남편을 떠나보내셨다. 고만고만한 것들 여덟 남매로도 모자랐는지 배안에 또 하나의 생명을 담은 채로 혼자 되셨다. 그러니 어느 한 밤인들 발 뻗고 편한 잠을 주무셨을 리 없다.

한없는 무거움에 짓눌린 여인은 남편을 잃은 지 일 년 만에 6. 25전쟁을 만나 불과 몇 달 사이에 두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장남은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북쪽 사람들을 돕다가 9.28 수복이 되면서 붙잡혀 간 후 종무소식이다.

그 아들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젖먹이 유복녀를 떼어놓고 미친 여자처럼 헤매고 다니셨다. 끝에서 셋째인 아들은 1.4후퇴가 한참일 무렵 폐렴으로 몸이 불덩이가 되어 숨을 몰아쉬는데도 속수무책으로 당신 무릎에 누인 채 잃었다.

거듭된 절망의 수렁을 혼자서 허우적대셨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 이야기를 들어드리고 싶다. 어머니 이야기가 끝나면 내 어릴 적 이야기도 꺼내고 싶다.

방학을 하면 어머니는 머리에 곡식을 이고 나는 달걀 꾸러미 정도를 들고 십리가 넘는 오일장엘 갔었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쓰셔야 할 돈이 많아 머리가 복잡하셨을 텐데 철부지 머릿속엔 장터에 대한 기대의 연기만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곡물을 팔고도 장마당을 몇 바퀴나 돌 동안 어머니 얼굴만 살피다가 끝내 냉수 한 모금 못 얻어 마시고 장터를 빠져나오면서는 실망을 느꼈다. 배고픔과 복받치는 서러움이 터진 봇물처럼 왈칵 몰려와 눈물이 고였다.

그래도 아무소리 못하고 어머니 뒤를 따라오던 지독한 슬픔은 영영 잊히지 않는다. 목멘 소리로 그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느새 나는 오일장터의 아이로 바뀌어 어머니 가슴에 머리를 묻고 꺼이꺼이 울리라. 그러면 어머니도 덩달아 흐느끼시며 내 등허리를 어루만지시겠지. 그러는 동안 벌써 창밖은 여명이 비쳐오고 아픔을 풀어놓은 나와 어머니의 가슴에는 오월의 아침 햇살 같은 화사함이 스며들리라.

어머니와 아들, 슬픈 추억의 향연을 위해 5월이여! 어머니를 모시고 오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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