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장로, 3대 한의사 가문을 이뤄

이제 온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된 박완종 집사는 너무 기뻤다. 그래서 날마다 가정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교회생활에서도 더욱 앞장서 충성했다. 그동안 예산교회는 더욱 부흥되어 예산읍에 50평의 큰 집을 사서 수리하여 옮기고 예배를 드렸다.

은혜 받고 신앙에 불이 붙은 박완종 집사는 한의원에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불탔다. 그래서 오후에는 의원 문을 닫고, 진료가방을 하나 들고 예산읍 근처 마을을 찾아가 의료전도를 했다. 먼저 마을의 이장을 찾아가 자기 신분을 밝힌 후, 무료진료를 왔으니 사람들을 모아달라고 부탁한다.

당시는 시골에서 병이 나면 읍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유명한 한의사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이장은 너무 좋아서 동네에 다니며 선전해서 환자들을 모아주었다. 그는 환자들에게 먼저 간단하게 전도했다. 만병의 대의사는 예수님이고 자기는 예수님의 수종을 드는 사람이니 모두 예수를 믿으면 병도 낫고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진맥을 하고 침과 뜸을 놓고 심한 환자에게는 약 처방전을 써주어 약을 사서 달여먹도록 했다.

이렇게 계속 의료 진료를 하다 보니 사람들에게 믿음이 생겼는지, 마을마다 주일에는 몇 사람이 한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를 알고 이창제 전도사가 지방회에 알리자 지방회에서 그곳에 기도처를 승인하고 순회전도자로 박완종 집사를 임명했다. 이렇게 그는 매일 저녁마다 의료가방을 들고 마을 하나씩 다니며 진료해주고 나서 예배를 인도했다. 이렇게 계속하여 마침내 신례원, 두곡리, 용궁리에 전도자를 파송하여 교회가 생겼다. 이들 교회가 설립되는 데에는 박완종 집사의 공로가 지대했다.

1938년경에 그는 신례원으로 점점 사람들이 몰려들자 크게 번성할 것을 알았다. 예산읍에는 한의사가 여러 명이 있어 서로 경쟁이 심했다. 그는 예산의 광제당 한의원을 접고 신례원으로 이사를 가서 ‘대동의원’ 간판을 새로 걸고 일을 시작했다. 교회는 그가 일찍이 전도를 시작했던 신례원성결교회를 다녔다. 그는 찾아 온 환자들에게 전도하고 기도를 한 후, 진료를 했다. 그래서 그를 통해 예수를 믿는 자가 자꾸 생겨나 교회부흥에 일조했다.

1940년대 초에는 소학교도 재대로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너무 많아 30여명을 모아 교회에서 밤마다 공부를 가르쳤다. 한글은 물론 한문과 성경을 이야기 식으로 가르쳐 그들의 문맹을 깨우쳤다. 그러나 1943년에 성결교회가 해산되어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렸다.

1944년 4월 태평양전쟁 말기에 장남 우린이가 해군에 징집되어 진해에 가서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곧 배를 타고 전쟁에 투입되었지만, 우린이는 신앙이 철저해서 큰 고통 없이 전쟁을 마치고, 해방이 되어 무사히 귀국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광복이 되자 박완종 집사는 맨 먼저 신례원교회를 재건하는데 힘을 다했다. 교회를 산 사람에게 다시 많은 돈을 주고 사는데, 박 집사가 많은 돈을 헌금했다. 그리고 그는 1948년에 신례원교회 초대장로가 되어 충성의 모범을 보이다가 1950년 3월 53세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뒤를 이어 장남 박우린 집사가 1959년에 나이 30세로 제2대 장로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한의사 시험에도 합격하여 ‘성한의원’을 개업하여 2대 한의사를 이었다. 박우린 장로의 5남매 중 2명이 목사(욱병, 윤병)가 되었고, 3남 희병이가 미국 나성에서 장로장립과 한의사를 개업하여 3대 장로와 한의사의 가문이 이루어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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