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인의 날이 계속 시행되어도 장애인들의 평등사회를 향한 절규는 멈추지 않는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처우가 나아졌다고는 하나, 그들이 편견을 극복하고 살아가기엔 아직 세상의 벽이 너무 높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장애인 복지법을 비롯해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 구제에 관한 법률, 장애아동 복지지원법 등이 제정되고, 지속적으로 다른 법들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이다. 느리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바람 속에도 유독 한국교회 만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1989년 장애인 주일을 제정한 이래, 장애인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외치고는 있지만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다. 장애인 주일이 제정된 지 30여년 가까이 되었음에도 장애인 주일을 지키는 교회는 많지 않다. 장애인에 대한 교회의 인식전환이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장애인선교에서 같은 자리만 맴도는 이유는 장애인을 같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구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장애인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편견하는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때문에 생색내기용으로 장애인시설을 방문해 물질적인 후원을 하는데 그친다. 이마저도 1년에 한 번 할까 말까다. 오죽하면 장애인 주일을 지키는 교회가 일간지에 대서특필되고 있겠는가.

한국교회의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비단 그들을 대하는 태도뿐 아니라, 설교 시간 등에서 그들을 지칭할 때도 되풀이 해 나타난다. 설교 시간에 여과 없이 터져 나오는 장애인 묘사, 곧 귀머거리, 벙어리, 문둥병자, 난장이, 앉은뱅이, 중풍병자, 곱사등 등 부정적인 호칭은 그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있다. 적은 물질적 도움을 제외하고는 장애인을 향해 한국교회가 뒷짐 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2000년 전 유대에 나타난 장애인 차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경에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자들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들이 보살필 것을 명령했다. 중도 시각장애인이 된 삼손(삿 16:28~31)을 통해 블레셋을 멸망시킬 뿐 아니라, 이삭을 통해 야곱에게 축복하도록 하고(창 27:1, 21~23), 중도 지체장애인이 된 야곱을 통해 비로소 ‘이스라엘(창 32:24~28)’이라는 축복의 이름이 주어졌다.

서로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다. 따라서 그들을 나와는 다른, 도움을 줘야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할 동반자로 여겨야 한다. 장애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사랑과 인격으로 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한국교회는 본받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더 이상 세상적 편견에 사로잡히지 말고, 장애인 주일을 맞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장애인이 우선되는 교회 공동체를 지향하고, 장애인과 함께하는 교회가 성경적인 교회임을 선포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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