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목사
올해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다. 교회의 본질 회복에 대한 강조와 함께 각종 기념행사들이 한국교회에도 넘실대고 있다. 이 와중에 최근 한국교회 핫이슈의 하나로 떠오른 겸직 목회에 대한 진지한 논의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공헌 가운데 하나는 직업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제공이다. 성서의 가르침을 토대로 성속(聖俗)의 장벽과 차별을 없앤 것이다. 익히 알고 있듯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삶을 행동적인 삶과 명상적인 삶으로 구분하였다.

두 종류의 삶이 모두 선하지만 그래도 명상적인 삶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은 중세 기독교의 골격을 형성하였고, 성직의 길은 세상 최고의 소명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헬라 이원론에 토대한 성속의 사상은 종교개혁에 의해 성서의 자리로 환원되었다. 모든 직업의 거룩한 의미를 재발견한 것이다.

일례로, 마르틴 루터는 성직자의 일은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나 집안을 보살피는 여인의 일보다 전혀 우월하지 않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직업관은 만인사제직과 직업소명설로 압축된다. 이 맥락에서, 겸직 목회에 대해 진지한 연구와 논의가 요청된다. 이는 종교개혁의 본질과 정신을 염두에 둘 때, 매우 시의적절한 안성맞춤의 화두라고 생각된다.

성결교회는 무엇보다 교회의 개혁 차원에서 목회자 겸직금지조항을 도입했다. 이는 1955년 헌법 제110조에 최초로 명시되었다. “목사는 종신직이니 현직에 있는 동안 언제나 목사의 칭호를 존속하며 타 직업을 겸할 수 없다.”

당시 목사의 겸직금지는 자격 조항이 아니라 호칭과 관련된 문제였다. 겸직으로 인해 목회자의 명예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교단 헌법에는 “다른 직업을 겸하지 않고 전적으로 헌신한 자”(제43조 2의 차)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목사의 자격과 관련되어 있다.

1955년 헌법에서는 목사의 겸직을 목회자의 명예에 적절치 않은 것으로 인식했다면, 최근 헌법에서는 겸직 그 자체가 목사 안수의 자격이 되지 못하며, 목사 직분 박탈의 요건이 된다는 것이다.

성결교회가 목회자 겸직금지 규정을 도입한 배경에는 목회자의 부정부패,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 교단 전통의 와해 위기 등이 작용했다. 이러한 아름답지 못한 현상의 배후에는 한국전쟁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막대한 해외구호물자와 관련된 사회사업이 톡톡히 한 몫을 차지했다. 그리고 사회사업의 선봉에는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목회는 뒷전이 되는 경향이 농후했다.

그뿐 아니라 구호물자의 수급과 분배 과정에서 각종 스캔들이 터졌고, 교회와 사회 내에서 목회자에 대한 중상과 비난이 들끓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성결교회의 교역자도 별 수 없다”는 여론이 회자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결교회는 교회의 개혁, 목회자의 정화, 대사회적 공신력의 회복 등의 차원에서 목회자 겸직금지 규정을 수용했던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제 목회자의 겸직금지와 관련해 재론의 때가 되었다고 하겠다. 목회자 겸직금지로 인해 교회나 사회 차원에서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교회의 폐쇄나 목회자 부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최근의 겸직 목회는 목회자 수급 조절의 불균형으로 초래된 것으로, 부의 누림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부득이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겸직 목회가 아니라 가정의 생계를 돌보지 못하는 전임 목회가 도리어 교회의 대사회적 공신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겸직 목회가 모든 사람에게 허용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겸직 목회를 악용하여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겸직 목회의 수용을 주장하면서도 매우 조심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겸직 목회의 수용을 방어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법은 없지만, 더불어 사는 것에 방점을 둔다면 개혁과 개정의 여지는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올해, 성결교회가 개혁가의 비전으로 역사에 의미 있는 일을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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