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로 기독교를 정의하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구원’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은 믿지만 그 삶이 따르지 못한 사람과 비록 예수님은 믿지 않으나 그 행동과 성품이 너무 근사한 사람중 누가 구원을 얻느냐고 묻습니다. 답은 분명합니다. 오직 십자가의 보혈 외에는 구원 얻는 길은 없습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 강도가 그토록 처참한 십자가에 매달린 것을 볼 때에 그는 악행을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에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참 뻔뻔해 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죄보다도 예수님의 긍휼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응답을 받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죄가 결코 가벼워서가 아닙니다. 대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 흉악한 강도가 지은 죄를 덮고도 남을 만큼 더 컸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복음이 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 죄와는 상관없이 주님이 피를 흘리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음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습니다. 보혈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복음이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 모릅니다. 힘이 들고 절망스러울 때마다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구약에서도 수차례 반복됩니다. 한 번은 모세가 광야에서 죽을 상황에 처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그 아들의 포경을 잘라 모세의 발앞에 던지자 모세의 죽음이 지나갔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호와께서 무슨 이유로 모세를 죽이시려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십보라의 이 행위는 할례로, 할례는 언약의 표입니다. 모세는 애굽에 있었던 관계로 언약의 표라고 할 수 있는 할례를 아직까지 받지 못한 듯 합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순종의 절차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 절차를 위하여 십보라는 그 아들의 양피를 잘라서 모세의 발 앞에 던짐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십보라는 자신의 남편 모세를 ‘피 남편’(히. 하탄 다밈)이라고 지칭합니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이 매우 분분하기 때문에 이 사건을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에서 먼 훗날에 있을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인한 구속 사건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보게 됩니다. 아들의 포피를 잘라 피를 내어 모세에게 던졌던 그 피는 우리를 위해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연상케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척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의 댓가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써 얻을 수 있는 보혈, 생명의 피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너무 소중합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댓가는 바로 그분의 아들이 흘리신 피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셨는데 어느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란도 끊을 수 없고, 낙망도 끊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두려움도 이 사랑을 결코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정말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 엄청난 사건이야말로 복음중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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