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백합교회 박훈 목사
여름엔 냉커피 나르는 마담

▲ 충분히 사용중인예천백합교회박훈 목사
어느 시골 교회의 목사가 소개한 ‘목사 사용 설명서’가 세상에 관심을 모았다.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시골에서 주민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주저하지 말고 연락해달라는 당부를 담아 잔잔한 울림을 준 것이다.

백합교회(박훈 목사)가 있는 예천군 우계리도 ‘목사 사용설명서’가 꼭 필요한 동네다. 마을의 120가구 중 70가구가 홀몸 노인이다. 2008년 이곳 예천 백합교회에 부임한 박훈 목사는 ‘목사 사용설명서’만 없을 뿐 이미 그렇게 충분히 사용(?)되고 있다. 젊은이가 부족하다 보니 어느날은 텔레비전 수리공이 되고, 장날엔 운전기사가 된다. 물론 밭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중심을 버리고 변방으로 향한 박 목사는 아무도 찾지 않는 시골 작은 교회에서 목회하며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자식처럼 그렇게 어르신들의 곁을 지키고 있다.

“농어촌교회 목회자라면 ‘목사 사용 설명서’가 없어도 다들 그렇게 살고 있어요.”

사실, 박 목사는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기 전에 먼저 어르신들을 곁으로 다가갔다. 여름에는 시원한 부채를 돌리고, 동네 경로당에 냉커피를 배달하며 ‘마담’도 자처했다. 겨울이면 동네 어르신 집의 연탄재를 버리는 일도 도맡았다. 이 때문에 연탄재를 수거하는 전용 리어카 만든지도 벌써 5년이 됐다. 가장 많은 일은 텔레비전 셋톱박스(수신기)와 리모컨을 조정해 주는 일이다. 오죽했으면 멀티 리모컨을 주머니에 가지고 다닐 정도다. 잘 안 되는 핸드폰도 그의 손길이 많이 가는 것 중 하나다. 이렇듯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달려가는 동네 반장 역할이 그의 주된 일이 되었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것도 그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다. 그는 벌써 7년째 20가구에 도시락을 배달하고 있다. 모두 홀몸 어르신들이다. 시골의 작은 교회다 보니 도시락은 도시의 큰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다. 그가 도시락 배달부를 자처한 것은 단순히 어르신들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홀몸 노인의 건강과 안부를 챙기기 위해서다. 이곳에 와서 말로만 듣던 노인들의 ‘고독사’를 두 번씩이나 목격했다.

“그 사건 이후 동네 어른들에게 잘해야지 생각했어요. 영혼구원이 목적이지만 교회를 안 나와도 어르신들에게 잘 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우리는 같이 사니까요”

그는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농촌노인들의 사회안전망 역할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시골 목회가 마냥 우울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 아버지 잘 돌봐주셔서 고맙다”고 선물을 보내는 자식도 생겼다. 

 

즐겁고 신나는 일도 있다. 두메산골 노인들이 온천욕 하는 날이다. 박 목사는 어르신이 온천탕에 가는 매월 월요일과 화요일, 상리와 하리 2개 마을 어르신들을 온천에 모셔다드리고 있다.  하루에 두 탕을 뛰는 날도 있다. 수고비도 주유비도 없는 봉사지만 그의 헌신 덕분에서 온천욕을 위한 차량지원 사업은 예천군의 대표적인 노인복지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그가 예천군기독연합회 서기로 활동할 때에 어르신을 위한 온천차량 봉사를 제안했기 때문이다. 매년 교회에서 봄·가을 동네 어르신들을 위한 온천 나들이를 실시한 박 목사는 이 때 노인들이 온천욕을 즐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이를 예천군기독교연합회 사업으로 확대시키는데 앞장섰다. 교회가 보유한 승합차를 통한 봉사활동을 계획한 것이다.

당시 예천군내 97개 교회가 있었고, 승합차는 100대가 넘었다. 당장 봉사할 교회를 모집했고, 30개 교회가 동참 의사를 밝혀왔다. 마을 경로당 360곳에도 “온천을 하고 싶은 어르신들에게 차량을 지원하겠다”고 공문을 보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지역 내 온천을 가려고 해도 버스를 2번 갈아타거나 비싼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노인들의 호응이 컸다.

교회 내에 사랑방을 만든 것도 어르신을 위해서다. 황토방을 만들어 동네에 개방한 것이다. 마당에 솥도 걸고 한방차를 끓여서 어르신에게 대접했는데 워낙 많이 찾다보니 요즘에는 일주일에 하루를 개방한다. 그래도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골목회는 여전히 어렵다. 처음에는 더욱 그랬다. 벌레와 곤충이 골칫거리였고 뱀이 길 한가운데 똬리를 틀고 있을 때는 어떻게 할 줄 몰라 뱀이 지나가기를 마냥 기다린 적도 있다.

도시에서만 생활한 박 목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다섯 자녀에게 그야말로 시골은 정신을 못차릴 곳이었다. 이런 어설픈 목사가 이제는 시골 목회자가 다됐다. 그는 “이제 도시로 등을 떠밀어도 절대로 못갑니더”라면서 “끝까지 시골교회의 지킴이로 남겠슴니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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