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국 목사
비구름이 남쪽으로 물러가고 마른장마가 이어지는 동안, 때 이른 폭염이 극성을 부렸다. 다음 주에는 비구름이 북상하여 많은 비를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했다. 정신이 번쩍 들어 부랴부랴 수화기를 들었다. 한 달 전쯤 어느 모임에서 P선생님을 뵈었을 때의 약속이 생각나서다.

“선생님! 언제 냉면이나 잡수실까요?”
“그렇게 하지, 적당할 때  연락 줘요.”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는 미리 말해 두었던 동창생 H도 나왔다. 셋이서 식당을 향해 걸었다. 구십을 향하고 있는 스승과 팔십을 바라보는 제자가 나란히 걷는 모습, 하늘도 보기가 좋았는지 강열한 햇살은 구름 뒤로 숨고 실바람이 살랑살랑 등줄기에 부채질을 했다. 선생님이 가보셨다는 그 식당은 무교동 꼬불꼬불한 골목 안 깊숙이 있었다.

이 집 주 메뉴는 ‘김치말이 국수’다. 잘 숙성한 김치를 송송 썰어 넣은 김치 국물에 국수를 말아 내 놓는다.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여름철 점심으론 제격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 1959년 서울신학대학교 입학식을 하던 날이 아련히 떠올랐다. 계절은 봄이라 해도 겨울 끝자락의 쌀쌀한 날씨여서 천정 높은 우중충한 낡은 강당은 한기로 가득했다. 입은 옷이며 신발이 부실해서 입학식 내내 손발이 꽁꽁 얼었건만 가슴만은 훈훈했다.

성직에 뜻을 정하고 첫 출발하는 감격과 흥분 때문이었나 보다. 그 날 앞자리에 앉은 연세가 지긋한 교수들 틈에 앳된 얼굴의 P선생님이 검정 양복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계셨다.

선생님은 학교의 요청도 있었지만 남편의 빈자리를 아들이 채워주기 바라는 어머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미국유학을 마치곤 이내 우리학교에 오셨다. 선생님의 선친은 우리학교에서 교수를 하시다가 6,25전쟁이 일어난 지 두 달 만에 동료 교수들과 함께 북으로 끌려가셨다.

내가 1학년을 마치고 군에 다녀와 복교했을 때 선생님은 이미 학교를 떠나셨다. 비록 만남은 짧았지만 뵐 때마다 생존한 마지막 스승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존재감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후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한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랫동안 재야에 몸을 담고 계시던 선생님이 60세가 다 된 연세에 목사안수를 받은 것은 뜻밖이었다. 안수를 받은 후 갈현동에 천막을 치고 교회를 개척하셨다. 천신만고 끝에 작지만 교회 건물도 짓고 그 교회에서 정년이 되기까지 목회를 하셨다.

교회형편이 어렵다 보니 목회하는 동안 생활비는 받지 않으셨다. 은퇴를 하고 나서도 자리 하나를 채우는 것이 보탬이 될 것 같아 교회를 떠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교회를 섬기셨다. 주일이면 찬양대에 앉아 예배를 돕는 봉사를 오래도록 하셨다. 후임 목회자가 “한 달에 한 번만 설교를 해 주시지요” 라고 제안해도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한참 젊은 후임 목회자를 아끼려는 마음에서다.

은퇴를 하고 나서 얼마가 지났다. 주일 예배시간에 교회 재정을 맡은 장로가 뜬금없이 퇴직금을 드리겠다며 앞자리로 나오시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받은 봉투를 다시 내어놓으며 “얼마인지 모르지만 종자돈으로 삼아 교회 기금을 만들어 보시오.” 하셨다.

얼마 후 담임목사에게, 퇴직금으로 주려던 돈이 얼마인지를 물었더니 천만 원이라고 했다.

“그런 거금인줄 알았으면 절반쯤 떼고 내 놓을걸 그랬지 뭐야”
껄껄 웃으시는 그 얼굴, 천진난만한 소년의 모습이다. 말씀을 듣는 동안 시간은 정지되어 있는 듯 했고 내 머릿속엔 어지러운 세태의 흐름들이 떠올라 실내 공기가 더운 것처럼 느꼈다.

높은 자리에 주님을, 낮은 자리에 당신을 두고 사시는 P선생님, 오래전 선생님의 세계문화사 강의내용은 잊은 지 오래지만 참 스승을 뵙는 하루가 한 없이 즐겁고 행복했다.

집에 오는 전철 안에서, 그 동안 내 입으로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쏟아놓았던 수많은 말들을 떠올리곤 도리질을 쳤다. 그리고 석양에 비춰질 지금까지의 내 발자취를 생각했다. 어떤 모습으로 보일 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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