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오 목사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인들이 주고받는 말에서나, 말씀이 증거되는 강대상에서 무조건 ‘복 받아라!’는 표현이나 ‘무조건 잘 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몹시도 싫어합니다.

한때 로버트 쉴러 목사의 ‘가능성의 신학’이 우리 조국과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거센 부흥의 기조에 기여를 했던 바도 있었지만 다소 분별없이 사용된 ‘복’ 일변도의 가르침이나 주장은 이제 한국교회의 짧지 않은 역사 속에서 재조명되고 재평가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지식인들과 젊은 신자들의 냉소적이고 관망적이며 유보적인 신앙은 오늘날의 교회에 큰 부담과 걱정이 되고 있습니다.

최근의 인구센서스의 통계에서 우리나라의 종교선호도에 기독교가 1위를 하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기관의 통계에 따르면 가나안성도(예수를 믿으나 교회에 안가겠다)가 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보아도 이와같은 현실을 여실히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다시 영적 도전과 우리 스스로를 일깨울 것을 촉구합니다. 이른 바 “영적 피동을 주의하라”는 말은 우리 신자들이 항상 마음에 새기고 돌아보아야 할 영적방향이요 태도일 것입니다.

성경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들의 인생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주목하지만 성경에는 의외로 실패하거나 부정적 관점에서 조명되고 있는 사람도 많으며 주어진 환경과 삶의 자리에서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일어서며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복과 승리의 주인공들을 살펴보노라면 공통점이 하나 발견되는데 성경 어디에서도 ‘가만히 앉아서 복을 기다리고 그 복을 누린 사람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모두에게서 발견하는 공통된 특징은 그들 모두가 ‘사모하는 사람들’이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나 복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주인공 삭개오는 세리 중에서도 세리의 장이요, 또한 부자였습니다.(눅19:1~2) 이 본문 안에서는 믿음을 고백하고 신자요 제자로 남은 삶을 살아갈 신자에게 믿음과 신앙의 태도를 정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주는 본문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해석하는 삭개오 기사의 중요한 관찰점이자 깨달음의 보화는 바로 삭개오라는 사람의 ‘영적태도’입니다. 놀랍게도 삭개오가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영적태도는 모두 ‘아직은 잘 알지 못하였다’는 상황을 뛰어넘은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그가 아직은 주님을 잘 알지 못했지만 그는 더욱 사모했다(눅19:3~5)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가 주님의 가르침을 다 알 수 없는 한 번의 가르침이었지만 들은 대로 도전하고 결단했다(눅19:6~10)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 두 가지의 관찰점을 고려한다면 우리 주님이 굳이 수많은 군중을 마다하고 삭개오의 집에 유하신 이유를 우리는 명백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신자의 품성과 태도 중에 으뜸을 뽑으라면 ‘사모’, ‘신뢰’, ‘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주권자이시며 지금도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유일한 창조주이십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 앞에 선 백성은 반드시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영적피동을 주의하라’는 권고는 생명이 움트고 있는 이 봄에 우리의 심령을 다시 기경하고 영적야성을 불러일으킬 중요한 도전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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