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칠순잔치에 형제들 모두가 초대된 시끌벅적한 잔치집에 나 홀로 초대되지 못한 이 느낌은 뭘까? 형제들마다 아버지께 드릴 선물 꾸러미를 양손에 들고 칠순잔치를 어떻게 치룰 것인지 논의하는데, 손님처럼 한쪽 구석에 앉아 빈손뿐인 못난 자식 같은 이 느낌은 뭘까?

루터교는 말할 필요도 없다. 장로교, 감리교 등 각 교단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행사가 진행중이다. 일찌감치 감리교신학대학에서는 교수와 학생들이 95개조를 다시 써서 매년 낭독하고 있는 중이다. 예장통합은 총회차원에서 14개 부분 95개조를 제시하고 있다. 95개씩이나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오직 이거다”라면서 다섯개라도 말해야 할 것만 같다.

예고된 시간 앞에서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채 갑작스럽게 맞이해버린 종교개혁 500주년, 텅 빈 내 모습만 보인다. 신학대학에 재학중인 것도 아니고, 교단을 대표하는 인물도 아니면서 정확하게 짚어지지 않는 어떤 것이 목젖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괴롭힌다.

기업 안은 전쟁이고, 기업 밖은 지옥이라며 어떻게든 이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말하는 고등학교 친구 이야기를 들으면서, 거룩한 척 하느라 말하지 못했던 혼잣말이 불쑥 생각났다. “개신교 목사로 사는 것도 전쟁 같다” 불쑥 튀어나온 생각 속에서 목젖을 오르락 내리락 하던 것이 이거였구나!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처럼 말했다. ‘개신교 목사’였군.

그래, 나는 개신교 목사이다. 가톨릭 신부나 정교회 신부가 아니라 개신교 목사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개신교이다. 당연한 이야기가 이렇게 생소할 수가 없다.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내 의식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우물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우물안 개구리가 500주년이 됐다고 갑작스럽게 우물 밖으로 나온 것이다.

교단 100주년을 시작하면서 우리의 신학적 정체성을 “개신교 복음주의 웨슬리안 사중복음”이라고 천명했지만, 내 의식은 복음주의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중복음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혼자서 독학을 하다시피했다. 웨슬리는 그나마 배운게 있어서 익숙하다. 복음주의는 조나단 에드워드,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등 발흥부터 논쟁까지 큰 얼개라도 가지고 있다. 거기까지였다. 나는 18세기까지 밖에 올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잠재된 의식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개신교 목사’라는 정체성이 누군가 밖에서 “500주년입니다”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깨어나보니 웨슬리까지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루터와 나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칼빈은 장로교에 관련된 분(?) 정도로 편하게 정리하고 살았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어떤 이야기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신학적 사고와 목회의 형식에 영향을 주었는지 나는 모른다. 우리 고모들이 명절때마다 나를 보면서 내가 어릴적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는데, 어디가 닮았는지 아버지의 빚바랜 사진 한 장만 가지고서는 알 수 없었던 것처럼 나는 루터라는 이름만 가지고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올 한해 동안 16세기까지 올라가봐야겠다. 루터가 95개조를 선언했던 10월 31일까지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겠다. 개신교 목사로서의 나는 루터와의 만남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어설픈 지식에 급조된 선언보다는 조금 늦더라도 루터와의 진지한 만남을 통해서 개신교 목사로서의 나를 조금 더 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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