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청년시절 내가 출석하고 있던 강릉교회에 젊은 총각 전도사가 담임교역자로 부임했다. 이미 앓고 있는 결핵 때문인지 마른체구에다 기침을 자주하는 이 분이 ‘과연 1923년에 창립된 강원도 영동지역의 성결교단 모교회의 담임교역자로 사역을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염려가 온 교회에 부정적인 분위기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오래가지 않았다. 강단에 서면 깊이 있는 설교와 강한 눈빛으로 성도를 사로잡았고 중단된 교회 건축을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성도들을 설득하고 부족한 건축비를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뛰셨다. 시간 있을 때 없을 때 가리지 않고 강단에 무릎 끓고 기도하시던 그 모습을 봤을 때 참으로 대단한 분이란 걸 그때 알 수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기도하면서 기침과 각혈을 반복하여 온 교회 성도들을 당황케 했고, 강릉에 유지로 명성이 있던 아버지가 경영하는 사업체도 있었지만 그는 얼마나 강직했으면 쌀 한 톨 도움 받지 않고 홀로 서기를 고집하던 그런 분이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재미있는 일은 이분이 결혼하던 날 준공치 못한 교회 바닥을 모래와 흙으로 채웠는데 신부가 입장할 때 힐이 모래 속으로 박히고 넘어질듯 말듯 아슬아슬하게 입장해 하객들과 성도들에게 폭소를 자아내게 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신학교에서 공부하시던 사모님을 만났고 건강치 못한 사정을 알면서도 전도사님을 신랑으로 맞이하여 평생을 보필하며 건강을 챙기고 남편의 목회를 돕고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기까지 눈물의 기도와 강한 삶의 의지로 살아왔을 것이다.

5, 6년의 세월이 흐르고 내가 나이 들어 군에 갔을 때 그분은 부평제일교회로 사역지를 옮기셨다는 말을 듣고 몹시 아쉽고 서운하고 그리고 한편으론 그런 몸으로 목회를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염려가 앞섰다. 솔직히 그때의 모든 성도들이 생각하길 목사님은 오래 사시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거친 숨소리와 기침을 토해내며 듣는 사람들에게 안쓰러움을 갖게 하는 설교 말씀은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힘이 아니고서는 그런 힘이 어디서 났을까?

그 분이 성결교단의 큰 기둥이 되어 총회장을 역임하신 강신찬 목사님이다. 그분이 당시의 아픔과 고통을 극복하고 크고 작은 일로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퇴임하시기 까지 목회자의 표상이 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각키 어려운 참말로 “놀랍다”라는 말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목회 중에도 늘 건강치 못한 상태였겠지만 그 시대 그 병으로 돌아가신 분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일찍 부르지 않고 그를 통한 계획이 있었다는 걸 목사님의 삶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오늘 내가 이분을 다시 거론하고픈 것은 몇 년 전에 퇴임을 하고 퇴직금 2억원 전액을 강릉성덕교회(김호영 목사 시무) 신축헌금으로 헌금했다는 것이다.

2006년 내가 영동CBS 선교국장으로 재임 시 ‘신앙과 삶의 현장’이라는 대담을 통해 알았지만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삶으론 도저히 결단하기 어려운 그 일을 선뜻 감당하셨다. 물론 이유가 있었다. 그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릉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농촌에 전도사로 첫 부임한 교회가 바로 성덕교회이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교회가 없어졌다가 다시 그 옛날 은혜 받은 성도들이 모여 교회를 다시 개척하고 몇 년 동안 지하에서 예배를 보다가 아담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시절 목회 의지를 불태우며 하나님 종된 자로서 건강을 뒷전으로 하고 오로지 그길, 그 고난의 길을 택하여 갖은 고생을 감수하며 무보수로, 그리고 성미가 없으면 굶기를 밥 먹듯 한 곳이 바로 성덕교회였고 겪은 젊은 목회시절의 추억이 묻어나는 곳이기에 목사님은 그런 결단으로 마지막 헌신과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작은 금액이지만 헌금했노라고 했다.

2억이 어디 작은 금액인가? 참말로 보기 드문 그 숭고한 신앙과 사명자의 높은 뜻을 보면서 나는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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