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결신문(지난해 10월 25일자)은 오늘의 한국교회에 대해 성장이 멈추고 선교가 막혀 최대 위기라고 진단하고 있다. 교회가 지금과 같은 선교의 열정과 기술로도 성장이 안 된다면 그것은 교회 자체가 사회에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교회가 지난날에 가졌던 선진적 위상은 온데 간데없고 지금은 오히려 개혁 대상이 돼버렸다. 그렇게 볼 때 대책은 교회 갱신이다. 이에 평신도 운동은 과거의 선교 중심에서 교회 갱신을 동반한 선교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불가피해졌다.

돌이켜 보면 1954년 WCC 에반스톤 대회에서 논의된 평신도 사도직과 “평신도는 교회의 생명과 사명에 있어서 그 위치가 강조되고 여기에 교회의 관심이 집중되어야 한다”라는 합의는 평신도들에게 ‘우리가 곧 교회’라는 주체의식을 심어 줬고, 선교는 전략적 위치상 평신도가 중심이 돼야 함을 일깨워 줬다.

평신도들은 교역자가 뒤에서 공급해 주는 동력을 힘입어 주께서 우리를 보내신 세상(요 17:18) 속에 파고 들어가 거기서 그리스도의 참된 증거의 장소를 찾게 됐다. 다시 말하면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 뿌리를 박고 세상으로 흩어져 나가 이 시대의 새로운 형태의 증거 방법으로 복음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자 함이다. 한데 만일 그 뿌리의 토양이 병들었다면 어찌 될까. 이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 평신도 운동에서 교회 갱신의 소명이 강조되는 이유다.

원래 현대 평신도 운동의 발생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급변하는 시대에 부응할 교회 혁신의 필요에서 였거니와 현대 평신도 운동이 대두되기 이전의 역사에서도 교회 혁신 운동은 다 평신도 운동의 모습이었고, 1175년경 프랑스 알비파의 평신도 운동은 기존 교단의 부와 세속화를 비판한 교회 갱신 운동이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대형화가 추세이지만 한편으로는 일부 대형교회 때문에 오히려 교회에 대한 사회의 호감도가 떨어져 이것이 선교의 역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그런 대형교회는 극소수가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하나 문제는 전국의 수많은 교회들이 그런 대형교회를 부러워하고 성장의 모델로 삼고 있을 것이란 점이다.

한국교회의 물량주의, 성장주의, 권위주의, 배금주의, 금권선거, 기복신앙, 목사세습, 정권과의 유착 등등의 속물근성을 말끔히 씻어내고, 교회만을 위한 이기적인 교회에서 세상 안에 있는, 세상을 위한 교회로 혁구갱신(革舊更新)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 도시교회의 귀족적인 모습은 성경에 근거한 예수의 정신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곁에 있어야 한다. 제비뽑기를 않고는 금권선거를 막을 수 없는 교회, 감투 때문에 분열 위기에 처한 교단, 이런 교회이기에 아직은 깨끗한 정치를 표방하는 정당을 만들 자격이 없다.

부패는 사회보다 덜하지 않으면서 봉사는 사회에 미치지 못하는 교회에 무슨 매력이 있어 선교가 되겠는가. 교회는 쓴 소리에 귀를 열고 스스로 ‘성전청결’을 하는 것이 살 길이다. 교역자의 무디어진 소명감과 성직의식 회복, 신자의 성결한 삶, 교회 갱신을 동반한 선교가 과제다.

금후 평신도 운동은 교회 갱신을 위한 교회의 질적 변화에 주안점을 둔 프로그램을 적극 개발하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평신도 운동의 역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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