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부터의 설교’가 종교개혁 본래 정신

새해가 되면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 설교계획도 인간의 속성과 성도의 온전함을 견인한다는 설교의 목표를 염두에 둘 때 목회자의 목회계획과 개교회의 특정한 상황에 더 큰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본질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변화’라는 점에서 이런 일반론과 달랐으면 한다!

종교개혁은 여러 가지로 평가할 수 있지만 인위적인 의식(Ritus)의 교회를 ‘말씀’의 공동체로 바꾼 것이야 말로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변화라 할 수 있다. 루터는 교회의 본질이 의식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깨달았고 ‘설교가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웅변하는 것처럼 말씀의 실존적 양태로써의 설교를 강조했다.

이런 입장은 그가 예배를 ‘설교예배’(Predigtgottesdienst)라고 명명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설교는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공적인 말걸음이며 교회는 바로 이 말걸음에 기저한 말씀모임이다. 설교자는 이 하나님의 말걸음에 봉사하는 자이다.

이런 말씀 사건으로서의 종교개혁의 본질을 인지한다면 그 500주년을 맞는 올해 설교자들은 개교회의 상황을 넘어 공동의 각성과 변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필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를 말씀위에 올바로 세움으로 말씀공동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원주의와 탈 종교적 현상으로 교회가 위기에 빠지다 보니 교회가 사회복지나 문화, 교양, 건강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며 사회속으로 파고들려 노력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의 기저에는 반드시 말씀을 통한 변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특별히 설교자는 루터의 조력자였던 멜랑히톤이 설파한 ‘해석과 적용’(rxplicatio et applicatio)이라는 설교의 공리 위에선 말씀의 증언자로 거듭나야 한다. 즉 기록된 계시의 말씀에 대한 충분한 주석적인 연구를 통해 ‘성경으로 부터의 설교!’라는 종교개혁 본래의 정신을 되새겨야 하며 심방과 상담을 통해 회중의 상황을 온전히 파악함으로 ‘대화’로써의 설교의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도가 중요하지만 성도의 삶과 성향을 알지 못하는 설교자의 영성은 자칫 현실과 괴리된 메시지로 흘러가기 쉽다. 이렇게 말할 것과 들을 대상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어거스틴이 주창한 설교의 공리처럼 ‘들을 거리가 있는 설교(docere)’ 그리고 ‘감동이 있는 설교(delectare)’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설교자의 노력위에 성령의 도우심이 부어진다면 인간을 변화시키는(flectere) ‘사건으로서의 설교’가 되지 않겠는가!

둘째 설교운영의 효율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필요하다. ‘설교 없는 예배는 없다’는 루터의 강조는 하나의 불변적인 당위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일주일에 10여 번의 설교를 해야 하는 한국교회 실정에서 이 당위는 무조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당장 설교자들은 24시간 열려있는 목회의 부담은 차치하더라도 그 엄청난 설교로 인해 질식하는 게 현실이다. 성도들 입장에서도 ‘설교에 급급한 설교자의 설교’가 은혜는 커녕 홍수 때의 범람하는 물처럼 흔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리되면 자칫 설교가 교회부흥을 저해하는 역기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런 위험을 피하고 교회를 말씀 위에 온전히 세우기 위해 ‘말씀의 전략’이 필요하다. 즉 루터처럼 주일에만 각기 다른 설교문으로 세 번씩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 없다면 예배의 차별화를 통한 설교의 차별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주일 설교는 말 그대로 설교자가 1주일에 한번 설교라는 이름으로 내세울 수 있는 설교이다. 성도의 60%가 일주일에 한번 예배에 출석하는 현실에서 설교자는 주일 설교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주일 오후나 저녁 예배는 ‘디다케설교’로 일종의 교육설교를 지향하기를 제안한다. 존 칼빈은 설교를 가리켜 ‘일주일에 한번씩 열리는 학교’라고 했는데 이 정신과 기능을 교육설교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 기독교 윤리적 주제나 교리, 이단사이비, 기독교 역사 등 다루어야 할 교육적 주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칠판이나 영상자료를 사용하거나 교육자료 배포 등으로 설교의 교육적 기능을 보다 원활하게 조력할 수 있다.

수요예배는 성서학당시간으로 활용하여 성경을 주석설교 식으로 다루는 것이 좋다. 수요일에는 대개 교회의 액티브 크리스챤이 고정적으로 출석하기에 본격적인 성서연구가 가능하다. 강해설교보다 한 단계 더 세밀하게 들어간 주석설교의 방식으로 단어와 문장을 세밀하게 분석적으로 파고드는 설교를 제안한다.

금요심야기도회는 교회가 성령의 능력 안에 머무는 교회의 영적 분화구로 활용되어야 한다. 설교자는 영적인 각성에 초점을 두는 설교를 기획하고 예배의 성격을 성도들이 마음껏 기도하고 마음껏 찬송하는 영적인 부흥회로 삼는 것이 좋다. 외부 강사 초청 일일 부흥회 식으로 운영하는 것도 고려해봄직 하다.

새벽예배의 설교는 크게 세 가지 방향이 가능하다. 먼저 온 회중이 성경을 일독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정해진 낭독자와 함께 성경낭독이 끝나면 설교자는 그날 낭독한 성경의 핵심 내용과 메시지를 간략히 요약한다. 또 매일 특정한 주제에 의한 특화된 주제설교를 진행하는 것이다.

가령 월요일은 희망 출발 비전, 화요일은 개인적 신앙의 주제, 수요일은 신앙의 사회국가적 주제, 목요일은 교리, 금요일은 가정(자녀 부모 부부), 토요일은 반성과 정리 등으로 특화할 수 있다. 마지막은 성경의 한 권을 정해 연속 강해설교를 하는 방식이다. 설교자는 유머나 예화 등을 사용하기 보다는 성경말씀을 깊이 있게 해석하는 ‘강해설교’가 바람직하다.

셋째,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하나님의 말씀’의 한 축인 성찬이 있는 예배가 강화되기를 제안한다. 마틴 루터가 말하는 하나님 말씀은 ‘보이는 하나님 말씀’(sichtbares Wort Gottes)인 성찬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 말씀’(unsichtbares Wort Gottes)인 설교로 이루어져 있다.

루터는 둘이 합해져 온전한 하나님 말씀을 이룬다고 보았고 이 정신에 입각해 지금도 루터교회에서는 매주일 예배마다 성찬을 거행한다. 물론 우리 교단은 서구 교회가 다시 생명없는 의식 중심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에 반발해 나온 성결운동의 결과이기에 조심스러운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의 온전한 의미를 재조명하고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찬의 가치를 재해석하며 실제화 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설교자는 성장을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함을 공동 목표로 삼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는 것이 주가 된 비디오(video)세상이다. 반면에 설교는 들음(audio)의 사건이다. 복음은 동일하지만 시대와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이 사이에 선 것이 설교자라면 내용의 질적 성숙을 위해 꾸준한 독서와 말씀 연구 그리고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자기 안의 거인을 키우는 작업이 필요하다.

동시에 새롭게 변하는 이시대의 흐름을 감안해 새로운 설교의 형식에도 눈을 돌려 설교운영의 틀을 확장해야 한다. 시청각 자료를 활용하거나 다양한 특수설교를 통해 설교전달의 폭을 확장하는 한편 설교를 위한 수사훈련 등을 통해 설교가 독백이 아닌 설득력 있는 대화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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