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막 섬기라!

이성훈 목사
우리 교단 목회자님이 쓰신 갓 출간된 따끈따끈한 수필집을 한 권 선물 받았습니다. 주제 하나 하나를 무척이나 맛깔스럽게 신앙으로 잘 풀어놓은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었습니다.

그 책의 저자인 목사님이 어느 날 속초에 있는 그 유명한 실로암 막국수집을 들르셨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막국수’라고 하면 왠지 대충 만들어서 먹는 국수라고만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말의 ‘막’이라는 말이 ‘함부로, 거칠게, 대충’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국수’에서 ‘막’이라는 말이 그런 말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 분의 수필집에는 ‘막’이라는 말이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막국수에서 ‘막’이란 “메밀가루를 익반죽하여 국수틀에 눌러 굵게 뽑아, 막(즉시) 삶아서, 가장 잘 우러난 육수와, 한 때에 막(금방)말아, 양념을 막(아끼지 않고 풍성히)쳐서 만들어 내는 국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막국수에서 ‘막’은 대충 대충 성의없이 만들어서 나오는 음식과는 정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지요. 그 국수에는 극진한 정성이 담겨 있었고, 진한 정이 담긴 국수를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그토록 사람들이 먼 길을 마다않고 그 국수를 먹으러 오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그 국수를 먹는 사람들이 행복해하고 즐거워하는 이유가 바로 ‘막’이라는 말에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점점 많아지자 애굽의 최고 권력자의 잔인한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산모의 분만을 도와서 갓난 아기를 받아 인간의 생명을 돌보아야 할 산파에게 오히려 생명을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의 산파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자신의 사명인 아기를 받아내어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자니 바로의 손에 죽게 될 것이고,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자니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와는 정 반대되는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산파들의 선택기준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히.야라 출 1:17) 이었습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히.야라)함은 ‘막’살아감으로써 지을 수 있는 죄된 삶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행위를 포기함으로써 죄짓지 아니하는 삶이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막’(대충)섬기게 되면 죄를 짓게 되고 그 결과 우리는 평안과 자유를 모두 빼앗길 뿐 아니라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만일 그 애굽의 산파가 하나님을 ‘막’(대충) 섬기는 삶을 선택하였다면 산파가 되었든 아이가 되었든 둘 중의 한 쪽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 길을 택하던 후회와 상처가 남는 사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최고의 인생의 주관자로 여기고 선택하여 걸어간’(히.야라) 길의 결과는 생명입니다.

잠언 9장 1절 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히.야라)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막’(히.야라) 섬기는 것이 지혜이자 최선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을 ‘막’(히.야라) 섬기게 되면 죄를 무서워하게 됩니다. ‘죄’를 무서워하게 되면 죄로부터 멀어질 수가 있게 될 것이고, 죄와 멀어지게 되면 반드시 받아야 할 상처와 형벌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 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막’(히.야라) 섬기게 됨이 지혜의 근본이라면 하나님을 ‘막’(대충) 섬기는 길의 결국은 어리석음과 멸망의 길로 이어질 뿐입니다. 계산이 흐려져 잠시동안의 유익을 위하여 걸어가지만 결국은 패망과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막’(히.야라) 섬김으로 생명의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그러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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