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요? 아니, 그리스도이든 아니든 상관없소. 나는 내일 당신을 이단자로 정죄하여 화형에 처할 것이오. 오늘 당신의 발에 입을 맞춘 그자들이 내일이면 앞 다퉈 당신의 화형대에 나뭇가지를 던질 것이오. 대체 왜 다시 왔소? 당신은 모든 권한을 교회에 일임하지 않았소? 우리는 당신이 이전에 말한 것으로 족하오. 당신은 다시 와서 새로운 말을 덧붙일 권리가 없소.”

▨…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대심문관의 일화로 우리를 경악케 한다. 많은 사람들이 화형을 당하는 세비야에 예수 그리스도가 소리 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사람이 예수를 알아보았고 자기도 모르게 그에게 끌렸다.” 도스토옙스키는 “예수는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그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던 것”이라고 다시 온 이유를 밝혔다.

▨… 교회를 대표하는 대심문관은 예수를 심문하면서 “우리를 방해하려고” 온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며 말했다. “우리는 당신이 아니라 로마와 카이사르의 칼을 따른다”고. 도스토옙스키는 마지막 부분을 살짝 비틀었다. 대심문관은 “예수를 어둠이 깔린 도시의 뒷골목에 풀어주었다. 그리고 죄수는 떠나갔다.”

▨… 2016년 성탄절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자리에 그 모습을 드러내셨을 것이다. 아니, 드러내셨다. 그것이 예수의 현존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이다. 그래서 교회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동네잔치 열고 나눔으로 성탄 빛 밝혔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교회의 본분이기에…

▨… 그러나 2017년,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대심문관의 예수’처럼 이 땅을 떠나실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중심에 교회가 있음을 부정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엄중하게 질문해야 한다. 교회가 교회를 향해서 이리가 되는 풍토의 교회가 “당신은 모든 권한을 교회에 일임하지 않았소?”라고 말하는 대심문관의 교회와 얼마나 다른가에 대해 이제는 입을 열어야 한다. 2017년에는 그 답을 밝혀야 한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부끄러워 늘어놓는 넋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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