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부르크요새의 루터의 방

슈말칼텐(Schmalkalten)은 개신교 제후들의 연맹체인 슈말칼텐 동맹이 만들어진 곳으로, 이 동맹은 이후 독일 땅에 종교개혁을 이룩한 실질적 힘으로 작용했다.

1531년 첫 창립때는 7개 제후와 11개의 도시가 참여했던 동맹은 6년 후에는 독일의 주요 제후들과 도시들 대부분이 참여할 정도로 강대해졌다. 이 회의에는 '루터의 신앙고백'으로 불릴만한 슈말칼텐 신앙고백이 제출되었다.

슈마칼텐성교회 내부 모습
시청사 내부 벽과 회의실 등엔 동맹에 참여한 나라와 도시의 문장이 걸려있었다. 60~70여명이 모일 수 있는 이곳 작은 회의실에서 동맹은 시작됐다.

시청사 옆 게오르겐교회는 회의에 참여한 제후와 신학자들이 예배한 곳이다. 병 때문에 준비실에 머물던 루터는 설교자로부터 “올라가라, 입을 열어 말하라. 그리고 다시 멈춰라”는 내용을 들었다고 한다. 루터에게 ‘종교개혁에 대해 외칠 것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것’을 암시하는 말 같다.

루터가 머문 집을 찾았다. 주황색 빛을 띤 전통가옥의 3층에는 기념장식이 조각되어 있었다. 루터를 상징하는 거위와 ‘슈말칼덴 신앙고백이 만들어진 복음적이고 신학적인 회의 장소’라는 문구였다. 루터는 신학자들과 이곳에서 신앙고백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신장결석으로 힘들어했던 루터는 몸이 붓고 죽음의 위기를 맞자 가족에게 돌아갔는데 그날 기적이 시작됐다.

울퉁불퉁한 숲길 위 마차에 누워 있었던 루터의 몸에서 결석이 빠져나온 것이다. 다음날 편지에서 루터는 “하나님이 나에게 이 밤에 입김을 부셨고 …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슈말칼텐 동맹으로 황제와 가톨릭 제후의 움직임이 분주해졌고 결국 1546년 2월 루터의 죽음 직후 황제는 군대를 일으켰다. 전쟁에서 개신교 제후들은 패배했고 황제와 가톨릭 제후들은 루터의 시신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로 논란을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황제는 ‘죽은 자와 싸우지 않겠다’는 말로 이를 거절했고 루터의 주검은 성교회 설교단 아래에 묻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후 황제의 오만함은 내부의 분열을 가져왔고 몇 년 후 개신교 제후들이 주도권을 다시 획득했다. 결국 전쟁은 양측의 화해로 마무리된다. ‘슈말칼텐 전쟁’이라 이름 한 이 전쟁을 통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협약, 평화조약이 체결됐고, 루터 교회는 독일에서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중세교회의 큰 문제를 치유하고자 하셨던 분의 손길이 루터 사후 개신교회를 독일 땅에 터 잡게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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