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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그 현장에 서다<8>
루터의 종교개혁, 독일 땅을 뒤덮다
독일 땅 가득 퍼진 종교개혁 … 루터의 죽음과 슈말칼텐 전쟁
[1070호] 2016년 12월 21일 (수) 17:41:09 조재석 기자 chojaeseuk@gmail.com

   

알텐부르크(Altenburg)는 작센 선제후들이 머물던 궁전 도시로, 루터의 동료인 게오르그 슈팔라틴이 목회한 곳이다. 루터는 1519년 교황 외교사절 칼 폰 밀티츠를 이곳에서 만나기도 했고 슈팔라틴을 만나 종교개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이곳을 14번 찾았다고 한다.

알텐부르크와 슈팔라틴
알텐부르크의 종교개혁은 1522년 선제후에게 독일어 설교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후 슈팔라틴이 바돌로매이교회에서 20여 년 간 목회하면서 종교개혁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슈팔라틴은 루터와 같은 나이로, 선제후의 종교담당 비서였다. 그는 루터를 바르크부르트 성으로 피신시키기도 했고 독일어 성서번역을 곁에서 돕기도 했다.

알텐부르크 성에서 열린 슈팔라틴 전시회를 찾았다. 전시실에는 중세 교회의 상황과 종교개혁, 슈팔라틴의 삶과 사역 등을 소개했다. 전시물 중 루터와 교환한 편지에 눈길이 간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일을 상의했던 두 사람은 동료요, 친구였다. 슈팔라틴은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의 중심 인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성교회에서 눈에 띄는 것은 설교단과 그 옆의 루터 얼굴이다. 1530년 10월 루터는 이곳에서 설교했는데, 그 모습을 보는 듯 3층 창문에는 성의 주인이던 작센 선제후들이 그려져 있었다. 루터의 설교로 힘을 얻고 강력히 종교개혁을 지지한 그들로 인해 종교개혁은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루터 동상과 도시 종교개혁을 이끈 린크와 슈팔라틴이 새겨진 브뤼더교회에 앉아 종교개혁은 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움부르크와 암스도르프
   
                                 나움부르크돔
나움부르크(Naumburg)는 1000년 경부터 주교의 땅이었다.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를 가는 길에 이 도시에 처음 들렸는데 1530년 초에 벤젤교회가 첫 종교개혁교회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주교의 반발로 종교개혁이 미뤄지다가 1542년 작센 선제후가 후임 주교에 개신교 목회자를 임명하면서 종교개혁이 본격화됐다.

루터의 동료인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로프의 주교 취임식은 루터와 선제후 등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는데, 그는 다음날 취임 설교를 시작으로 주교 영지를 종교개혁 도시로 탈바꿈 시켰다.

종교개혁이 시작된 벤젤교회에 섰다. 교회 옆 암스도르프의 작은 집무실은 겸손한 목회자로 살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그가 사역했던 나움부르크 돔은 비록 4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그가 주민을 섬긴 중심 장소다. 설교단은 그가 말씀을 선포한 곳이며, 그 옆 강단은 성찬을 집례한 곳이다.

중세의 아름다운 조각을 품은 대성당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개신교회로 탈바꿈 시킨 그곳에서 형식(예배당)보다 내용(설교)을 강조한 루터교회를 떠올리게 한다. 돔에 있는 예배용 성서와 찬송을 펼쳐 낭독할 수 있는 대형 독서대와 중세시대 종교적 예술품을 담은 장소들, 인물 표정이 생생한 서쪽 제단 출입문의 성서 이야기는 우리의 신앙을 다시 생각게 한다.

할레와 요나스
할레(Halle) 또한 10세기부터 마그데부르크 대주교 영지이다. 특히 이곳에는 면죄부 판매로 루터의 강력한 적대자였던 알브레히트 대주교가 30여 년 이상 살던 땅이다. 하지만 대주교는 종교개혁을 요구한 시민들이 1541년 루터의 동료인 유스투스 요나스를 마르크트교회 설교자로 초빙하면서 도시를 떠나게 된다.

   
                     할레마르크트교회
루터는 종교개혁이 터 잡은 1545년 마르크트교회에서 설교했고 이후 몇 차례 더 이 도시를 찾았다. 특히 아이스레벤에서 사망한 루터의 육신은 비텐베르크에 묻히기 전 이곳에서 하룻밤 묵기도 했다. 이런 흔적이 새겨진 할레는 18세기 초 루터를 계승한 경건주의자인 프랑케에 의해 새롭게 종교개혁을 꽃피운 도시이기도 하다.

대주교가 살던 모리츠부르크 궁전에서 추기경과 루터와의 대립을 생각했다. 이름도 없는 수도사가 도전하자 추기경은 대성당을 찾아 사탄의 방해를 물리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이다. 사탄의 방해를 물리쳐 달라는 그의 기도를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셨을지 궁금해진다.

할레 종교개혁의 중심지인 마르크트교회 앞에 섰다. 교회 동쪽 벽에는 루터를 기념하는 부조가 있는데 루터의 얼굴과 함께 ‘알파’와 ‘오메가’가 새겨져 있다. 할레 시민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종교개혁의 시작과 끝을 의미한다고 여긴다.

교회 내 작은 박물관을 찾아 ‘루터의 설교단’과 루터 시신에서 본 뜬 얼굴과 손, ‘토텐마스케(Todenmaske)’를 만났다. 루터의 다부진 눈과 입, 손은 그의 삶과 걸어온 길을 상징하는 것 같다. 편안히 잠든 얼굴에서 '달려갈 길을 마친' 루터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루터의 견고한 성 ‘코부르크'
   
                            코부르크요새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진리와 방패 되시니…” 루터는 자신이 작사한 찬양에서 ‘주 하나님’을 ‘강한 성’에 비유했다. 그 성의 하나가 바로 코부르크 요새(Coburg Veste)다.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설 수 없었던 루터는 1530년 4월 15일부터 6개월간 이곳에 머물며 개신교 제후, 멜란히톤의 활동을 지원했다.

루터는 예배실에서 기도하고, 창문이 있는 방에서 편지 쓰고 구약성서도 번역했다. 성에 머문 170여 일 중 120여 통의 편지를 썼는데 아우크스부르크에 보낸 것이 70여 통으로, 루터의 관심은 온통 그곳을 향해 있었다.

루터가 머문 거실에는 두 개의 창문과 탁자, 루터의 얼굴과 종교개혁 시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창문 앞 탁자와 의자는 루터의 생활을 상징한다. 창가에 앉아 편지를 쓰고 배달원에게 제국의회 상황을 질문했다.

또 이곳에서 루터는 구약성서 번역에 집중했다. 1534년에 신구약성서가 출간된 점을 고려하면 코부르크 시기는 루터에게 매우 중요하다. 시편과 예언서를 번역하며 루터는 자주 악마를 보았다고 한다. 어느 날엔 잉크(병)을 던지기도 했다.

루터가 머물던 안쪽 방에 들어섰다. 한쪽 벽에는 “나는 죽지 않을 뿐 아니라 살고, 여호와의 하신 일을 선포할 것이다(시 118:17)” 말씀이 라틴어와 독일어로 쓰여 있었다. 다른 쪽 벽에는 루터와 멜란히톤, 그의 부인 카타리나와 제국의회에 참석한 부뤼케 등이, 여섯 명의 종교개혁을 지원한 선제후가 그려져 있었다.

루터의 방을 나서 ‘루터 예배실’에 들렸다. 동료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루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코부르크 요새를 통해 병약한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을 이루어가셨던 하나님을 묵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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