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녀 탄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성탄절이 다가오면 예수님의 탄생이 함의한 구원사적 의미와 함께 동정녀 탄생(수태)의 신비감에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된다. 예배 때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사도신경을 암송하기에 더욱 친숙한 내용이다. 메시아의 탄생과 관련된 성탄의 이미지에 담긴 신학적 의미를 탐색하면 믿음생활과 성경읽기에 매우 유익할 것이다.

예수님의 경이적인 탄생을 천사가 고지하는 내용은 마태복음(1:18~25)과 누가복음(1:26~38)에 생동감 넘치게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두 복음서의 기록당시 동정녀 탄생(수태)이 초기기독교공동체의 삶과 예배자리에 이미 확고하게 정착되었음을 반증한다. 마태와 누가가 천사의 탄생고지를 동정녀 탄생 이야기와 함께 기록한 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실제로 천사의 탄생고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기도 하다.

목가적(牧歌的) 향취와 함께 예수님의 탄생장소가 어느 곳인지 묻기도 하는데, 베들레헴과 나사렛 사이가 그리 멀지 않음(110km)을 고려할 때 요셉의 베들레헴 방문은 쉽게 해결될 사안이다. 도리어 다윗의 집안에서 출현할 메시아에 관한 기대가 중요한데(미 5:2; 마 2:1; 눅 2:4, 15; 요 7:42 등) 예수님이 다윗가문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한 여관에 묵을 곳이 없었다(눅 2:7)는 기록은 특정(친척) 집의 안방이나 손님을 위한 사랑방이 없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은 호적(, 지금의 인구조사인 센서스)을 등록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축에게 먹이를 주는 구유에서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구유와 집 사이의 간격이라곤 몇 발자국만 떼면 닿을 정도였으니 현대식 축사(畜舍)나 가옥과는 차이가 컸을 법하다. 관례적으로 부정적인 부류로 간주된 목자들이 이들을 방문한 것은 적절한데, 예수님이 가난하고 버림받은 소외자들을 위해 오셨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도 이와 유사하다.(마 2:1~12)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들이 세운 파르티아 제국에서 온 점성가들로 보이는 이들의 방문은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스라엘의 무관심과 적대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마태복음이 구원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밝힌다.

그들의 방문 시기는 어린 예수가 태어난 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헤롯대왕이 그를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 학살대상을 두 살부터 그 아래라고 명령한 사실(마 2:16)이 이를 뒷받침한다.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방문기사는 예수의 탄생장소와 그들의 방문에 관한 전승이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 비판적으로 동정녀 탄생의 사실성을 검증하겠다고 나서는 도전적인 태도는 신앙적 진의(眞意)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어 특히 유의해야 한다. 동정녀 탄생에 관하여 가장 명백하게 언급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는 구절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러한 생각의 기저(基底)에는 ‘약속과 성취’라는 구원사의 기본구조가 있다. 메시아의 탄생을 다시 묻는 이유는 유대교의 경전인 타나크(Tanakh, 율법서/예언서/성문서)가 아니라 구약성경(Old Testament)이 기독교의 정경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의 해당 구절이 수백 년 이후에 있을 동정녀 탄생을 위한 예언고지로 이해되었다면, 이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 동정녀 탄생이야기를 초대교회가 창작했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선 동정녀 탄생이 아니라 아하스 왕의 아들이자 왕위계승자 히스기야를 지칭한 것이다. 즉 유대교는 이 구절을 메시아와 연결해서 해석하지 않았다.

70인역(LXX)에서 ‘알마’()가 ‘파르테노스’()로 번역된 것도 ‘처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성관계를 통해 임신할 수 있는 여성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처녀인 상태에서 임신한 여성인 동정녀를 지칭하는 말로 해석되지 않았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때문에 이사야 7장 14절이 그렇게 해석되었지, 그 반대 경우란 있을 수 없다는 의미다. 즉, 이 구절이 동정녀 탄생과 관련된 천사의 고지를 창작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역사적이고 신앙적인 사건이 이사야의 이전 예언을 메시아적으로 해석하게 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이사야의 예언은 당시에는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지시한 것으로 이해될 수 없다. 그렇지만 임마누엘이란 이름이 이사야 8장 8, 10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임마누엘이라 불릴 어린 아이에 대한 서술이 이사야 9장 6~7절과 11장 1~2절로 이어지는 사실은 이사야 7장 14절이 당시 역사에 관한 단편적 예언이면서 동시에 메시아의 탄생에 관한 종말론적 예언으로 이해될 가능성을 함축한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의 탄생을 통해 이사야 7장 14절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은 부활이후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약속하며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바울서신과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선재(先在)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成肉身)했음을 가리키는 고(高)기독론과 상충되어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사건이 일치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W. Pannenberg) 그러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의 창조가 얼마만큼 신비한 사건인지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이성(理性)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창조와 신비의 기적을 알려주는 경이로운 사건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이교신화와 종교에서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교(異敎)이야기와 신약성경의 기사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존재와 공적사역이 성경의 중핵임을 가장 탁월하게 입증한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 그 속에 얼마나 엄청난 비밀이 녹아있는지 이해하긴 쉽지 않다. 과학적인 사고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동정녀 탄생이나 별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을 방문한 목자들의 이야기를 곧이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성의 한계 내에서만 이해하려는 굳은 의지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동정녀 탄생을 보고하는 복음서 저자들의 한결같은 태도는 이러한 이해방식과 다르다. 그들은 메시아의 도래라는 전무후무한 구원사의 위대한 사건을 조명하여 그분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증언한다.

결국 성경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탄생이야기가 제시하는 것은 처녀가 임신했다는 단순한 사실에 머물지 않는다. 또한 동정녀 수태로 인해 예수의 부모가 당할 수치심이나 사람들의 입방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동정녀 탄생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만민의 구원을 위해 태어났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절을 기다리며 묵상할 요점은 메시아의 탄생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이라는 주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구시렁거리는데 머물러선 안 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분의 구원계획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성탄절을 맞이하는 믿는 자의 태도이다.

복음서 저자들이 실제로 전달하려고 의도한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하고 파악해야 하며, 나아가 독서의 최고단계인 ‘몸으로 경험하기’에 이르러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드러난 사실성을 증명하려는 노력보다 그 속에 함축된 예수님의 도래가 만민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점을 깨닫게 만들어 진정한 구원을 체험하도록 이끌 것이다. 모든 독자들의 삶 속에도 메시아를 통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길 기원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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