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21~24)

토기장이의 비유는 하나님은 토기장이시고 사람은 토기인데 토기를 이렇게 저렇게 만들건간에 토기는 토기장이에게 주장할 권한이 없다는 내용이다.

얼핏 보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허수아비 내지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사실 이 비유의 목적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구원관을 바로잡기 위함에 있었다.

당시 유대인의 잘못된 구원관은 첫째,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고 이방인들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아가서 유대인(이스라엘)이 되기만 하면 저절로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둘째, 율법을 열심히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 쉽게 설명을 하자면 이렇다. 기존에 만들어진 고급도자기 100개가 있고 이후에 싸구려 도자기 50개를 만들다가 토기장이의 마음이 바뀌어서 싸구려를 정성들여 손을 본 후에 고급도자기로 변신을 시켜서 고급도자기 100개와 함께 진열을 시켜 놓은 것이다.

한데 이때부터 100개의 기존 고급도자기들이 항의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저 50개의 도자기는 원래 싸구려 도자기가 아닙니까? 저들은 그대로 싸구려로 우리는 고급으로 취급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에 토기장이는 “이렇게 만들건, 저렇게 만들건 너희가 무슨 상관이냐? 토기제작은 나의 주관이지 너희 주관이 아니다. 너희들은 토기일 뿐이고 토기장이는 바로 나다”라고 했다.

이 토기장이 비유에서 두가지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구원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믿음(은혜)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이다. 율법의 원래 기능은 질서있는 사회와 신앙생활을 돕기 위한 보조수단일 뿐 율법이 구원의 조건이요, 삶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모르고 있었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지 율법의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아브라함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다.(창 15:6)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음에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잘못된 주장을 함으로 그리스도는 결국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만 것이다.(롬9:32)

현대 교회 내에서도 유대인들의 신앙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은혜를 사모하기 보다는 율법의 행위를 보이려고 하는 자들이다. 율법은 겉으로 드러난 의인 반면에 믿음은 내 안에 쌓여진 의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둘 다 있어야 하겠지만 율법의 의만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면 다툼과 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내 안에 쌓인 의를 주장하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헌신과 충성을 하는 성숙한 단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은혜 속에 거하는 겸손한 신앙인들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 메시지는 그래서 구원은 믿는 자 모두에게 주어지기 보다는 남은 자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무조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남은자가 될 때에 구원받게 되는 것처럼(롬 9:27)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요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요 끝까지 남은 자가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마치 홍수로 멸망한 시대에 살아남은 8명의 노아식구처럼, 엘리야 때의 7000명의 의인처럼, 그리고 기적 때문에 따라다니던 백성들도 어느때부턴가 다 흩어지고 영생의 말씀 때문에 예수님 곁에 끝까지 있던 열 두 제자(요 6:68)처럼 말이다.

인생의 태풍 속에서 혹은 관계의 어려움, 세상의 미혹 속에서 알곡과 가라지는 구분되게 되어 있다. 신앙생활 하다가 도중에 넘어진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특히 내 힘만으로 신앙생활 하려는 자는 언젠가는 지쳐서 떠나게 된다.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은혜-기도)을 붙잡고 끝까지 남은 자가 되어 최후의 영원한 면류관을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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